[우난순의 필톡]오래된 것들에 대한 찬가

  • 오피니언
  • 우난순의 필톡

[우난순의 필톡]오래된 것들에 대한 찬가

  • 승인 2016-05-26 10:51
  • 우난순 교열팀장우난순 교열팀장

내 오랜 친구는 종종 얘기한다. 그때 네가 차려준 밥상을 잊지 못한다고, 봄 햇살 잘 드는 조그만 방에서 너랑 마주앉아 밥먹던 그날이 그립다고. 15년 전이었을게다. 서울에서 직장다니는 친구가 대전에 온다길래 밥 한끼 해줘야겠다 싶어서 집으로 초대했다. 아욱국, 돌나물 무침, 콩나물 무침, 구운 고등어 한 마리, 쪽파 데쳐서 무친 것, 애기배추 겉절이 등. 아주 소박한 밥상이었다.

책상겸 밥상으로 쓰는 코딱지만한 앉은뱅이 책상에 그것들을 차려놓고 보니 한 상 떡 벌어지는(?) 밥상이 됐다. 친구는 밥상을 보자 감격에 겨워 울먹였다. 아욱국에 밥말아서 후루룩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나물반찬을 이것저것 집어 먹으며 나물 이름을 묻기도 했다. 서울서 오랫동안 혼자 살며 집밥이 꽤 그리웠던 모양이었다. 다만, 채식주의자인 친구는 고등어구이는 그래도 몇점 뜯어먹는 성의를 보였다.

친구랑 깔깔대며 밥먹던 그 앉은뱅이 책상에서 지금 이 글을 쓴다. 내 역사와 추억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앉은뱅이 책상. 대학 2학년때 기숙사에 입사하며 산 거니까 30년이 돼 간다. 다리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베니어합판으로 된 거지만 튼튼한 이 책상은 당시 기숙사생들은 누구나 갖고 있는 필수품이었다. 학기가 바뀔 때면 방을 새로 배정받아 이불보따리, 책 꾸러미와 이 책상을 들고 이사다니는 게 일이기도 했다.

이 책상은 나와는 질긴 인연으로 맺어진, 가족보다 더한 존재다. 30년을 같은 공간에서 같이 호흡하며 이것만큼 내 손길이 닿은 게 있을까. 나의 희로애락을 적나라하게 지켜본 이가 누가 있겠는가 말이다.




웃픈 에피소드가 있다. 오래전 실연의 상처로 하루하루 고통스럽게 보내던 날들이 있었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굳이 시 구절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당시로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절망을 껴안고 살았다.

하루는 퇴근해서 밥맛도 없던지라 짜장면을 배달시켰다. 앉은뱅이 책상에 짜장면 한 그릇 올려놓고 싸구려 단무지를 우적우적 씹으며 짜장면을 입에 욱여 넣었다. 이런 게 소태맛이구나! 꾸역꾸역 먹고 있자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쁜 놈. 염라대왕 발바닥이나 핥아라.” 문득 눈물·콧물로 범벅된 짜장면을 먹는 내 모습을 TV 장식장 위에 놓인 거울 속에서 보았다. ‘꺄악!’ 하마터면 돼지 멱따는 소릴 질러 소란죄로 경찰서에 끌려가 벌금형이라도 맞을 뻔했다. 이게 누구시더라?

낯설고 전혀 친근하지 않은 캐릭터가 나를 바라보는 게 아닌가. 마스카라가 번진 눈두덩은 강시가 “누나”라고 부를 것만 같았고, 볼을 타고 흘러 내린 까만 눈물자국은 ‘귀곡성2’라도 찍어야 할 판이었다. 가관이었다. 어이가 없어 웃음보가 터졌다. 그날의 조울증적 히스테리를 거하게 치른 덕분에 다시는 고놈한테 전화 거는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다.

바로 위 언니는 이 책상을 볼때마다 이제 그만 버리라고 성화다. 언니 눈엔 구닥다리로만 보이는지 내 집에 올때마다 잔소리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지난 주말엔 멀쩡한 커튼을 바꾸자며 곧 사 갖고 온다는데, 참 나.

현대의 소비 이데올로기는 아직 사용가치가 충분한 상품을 폐기처분하도록 강요한다. 이것이 산업자본주의가 찬양해 마지않는 소비의 미덕이다. 장 보드리야르는 산업자본주의 발달의 핵심에는 인간의 허영과 욕망을 부추기는 유혹적인 소비 논리가 있다고 선언했다. 소비자들은 냉장고, 세탁기, TV, 휴대전화, 옷, 가구 등 새로운 것으로 갈아치우기 바쁘다. 그들에겐 오래된 것들은 케케묵은 과거에 불과한 것인가.




얼마 전 친구랑 옥천의 금강변에 자리한 레스토랑에 갔다가 오래된 나무를 만났다. 굴참나무인데 품새가 늠름하면서 우아했다. 둘레가 몇 사람이 팔을 두를 만큼 장대한 그 나무는 수령이 400년쯤 됐다고 하니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에 생을 시작한 셈이다. 연륜이 느껴지는 골이 깊게 파인 나무의 껍질은 거북이 등처럼 단단했다. 층층이 수평으로 뻗은 줄기는 장구한 세월을 넉넉히 품은 거인의 풍모를 닮아 있었다. 굴참나무는 오랜 세월 사람들에게 그늘을 내주었고, 다람쥐를 먹여 살렸고, 새들의 집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나무는 말없이 인간과 자연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경이롭나.

나무든 물건이든, 하루하루 견뎌내며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건 분명 어마어마한 일이다. 사람도 그렇다.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는 굴참나무처럼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는 치열하게 사는 인간적인 노년의 면모를 보여줘 감동을 준다. 허나 광주항쟁에 대해 자신은 책임이 없다는 전두환씨 같은 뻔뻔한 노년의 모습은 징그럽다. 다음 달 서울 친구 선화랑 만나기로 했는데 구수한 된장찌개 끓여서 볼이 미어터지게 상추 쌈이나 싸 먹을란다. 내 오래된 밥상에 마주 앉아서 말이다.

우난순 교열팀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날씨]대전·충남 1~5㎝ 적설 예상…계룡에 대설주의보
  2. 세종시 체육인의 밤, 2026년 작지만 강한 도약 나선다
  3. '자기계발 명상 캠프', 20대에 써내려갈 성공 스토리는
  4. '대통령 세종 집무실', 이 대통령 임기 내 쓸 수 있나
  5. 햇잎푸드, 100만불 정부 수출의 탑 수상... "대전을 넘어 전 세계로"
  1. 천안법원, 정지 신호에도 직진해 사망자 유발시킨 30대 중국인 벌금형
  2. 국제디지털자산위, 필리선 바타안서 'PPP 개발 프로젝트 밋업' 연다
  3. 천안문화재단, 2026년 '찾아가는 미술관' 참여기관 모집
  4. 대전시장 도전 許 출판기념회에 與 일부 경쟁자도 눈길
  5. 백석대, 천호지 청춘광장서 청년·시민 협력 축제 성료

헤드라인 뉴스


[대전, 일류 문화도시의 현주소] 국립시설 `0개`·문화지표 최하위…민선8기 3년의 성적표

[대전, 일류 문화도시의 현주소] 국립시설 '0개'·문화지표 최하위…민선8기 3년의 성적표

대전시는 오랜 기간 문화 인프라의 절대적 부족과 국립 시설 공백 속에서 '문화의 변방'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민선 8기 이장우 호(號)는 이 격차를 메우기 위해 대형 시설과 클러스터 조성 등 다양한 확충 사업을 펼쳤지만, 대부분은 장기 과제로 남아 있다. 이 때문에 민선 8기 종착점을 6개월 앞두고 문화분야 현안 사업의 점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대전시가 내세운 '일류 문화도시' 목표를 실질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단순한 인프라 확충보다는 향후 운영 구조와 사업화 방안을 어떻게 마련할는지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중도일..

"대전 충남 통합논의" … 金총리-與 충청권 의원 전격회동
"대전 충남 통합논의" … 金총리-與 충청권 의원 전격회동

김민석 국무총리와 더불어민주당 충청권 의원들이 대전시와 충남도 행정통합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전격 회동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얼마 전 충청권을 찾아 대전 충남 통합에 대해 긍정적 메시지를 띄운 것과 관련한 후속 조치로 이 사안이 급물살을 탈 수 있을지 주목된다. 복수의 여권 관계자에 따르면 김 총리와 민주당 충청권 의원들이 15일 서울에서 오찬을 겸한 간담회를 갖는다. 김 총리와 일부 총리실 관계자, 대전 충남 민주당 의원 대부분이 참석할 것으로 전해졌다. 회동에서 김 총리와 충청권 의원들은 대전 충남 통합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대전역 철도입체화, 국가계획 문턱 넘을까
대전역 철도입체화, 국가계획 문턱 넘을까

대전 원도심 재편의 분수령이 될 '대전역 철도입체화 통합개발'이 이번엔 국가계획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14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정부는 올해 초 철도 지하화 선도지구 3곳을 선정한 데 이어, 추가 지하화 노선을 포함한 '철도 지하화 통합개발 종합계획' 수립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종합계획 반영 여부는 이르면 12월, 늦어도 내년 상반기 중 윤곽이 드러날 전망이다. 당초 국토부는 12월 결과 발표를 예고했으나, 지자체 간 유치 경쟁이 과열되면서 발표 시점이 다소 늦춰질 가능성도 점쳐진다. 실제로 전국 지자체들은 종합..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까치밥 먹는 직박구리 까치밥 먹는 직박구리

  • ‘겨울엔 실내가 최고’…대전 곤충생태관 인기 ‘겨울엔 실내가 최고’…대전 곤충생태관 인기

  • 병원도 크리스마스 분위기 병원도 크리스마스 분위기

  • 트램 2호선 공사현장 방문한 이장우 대전시장 트램 2호선 공사현장 방문한 이장우 대전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