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광장] 성인지 감수성 시대의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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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광장] 성인지 감수성 시대의 장면들

법무법인 윈 신기용 대표변호사

  • 승인 2022-04-13 08:39
  • 이현제 기자이현제 기자
신기용
신기용 변호사
얼마 전 길을 걷다 우연히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1년 전쯤 성폭력 사건으로 고소됐다가 천신만고 끝에 무혐의 처분을 받았던 의뢰인이었다.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누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죄명이 준강간인 사건이었다. 고소인은 술에 취해 잠이 든 사이에 의뢰인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의뢰인은 서로 좋아서 잠자리를 같이했을 뿐이라고 했다. 사건이 있었던 날 이후 몇 차례 데이트를 하기도 했고 연인처럼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때 나한테 왜 그랬냐'는 황당한 메시지가 오기 시작하더니 경찰에서 고소장이 접수됐다는 연락이 왔다는 것이었다.

의뢰인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생각에 당당히 수사에 임했지만 분위기는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피해자의 일관된 진술이 증거라는 것이었다. 당시 여러 변호사의 상담도 받아봤지만 적당히 합의하라는 조언이 이어졌다. 성인지 감수성 판결 이후 성범죄 사건에서 무혐의를 받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라는 것이었다.

의뢰인은 억울했지만 고소인에게 수백만원의 돈을 줬다. 하지만 고소인은 합의서를 써 주지 않은 채 몇천만원을 더 요구하기 시작했고 경찰에서는 잘못하지 않았으면 왜 돈을 줬느냐고 의뢰인을 다그쳤다.



뒤늦게 우리 법인을 찾아왔을 때 상당히 막막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리 억울함을 피력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 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약 없이는 잠들지 못하고 낮에도 일을 전혀 하지 못해 직장마저 포기할 걱정을 하고 있던 의뢰인의 상태가 너무나 심각했다.

고민 끝에 그래도 진실을 밝혀보자고 했다. 차근차근 정황증거들을 모으고 사건 당시와 전후 상황을 소상히 설명하고 설득해야 했다. 많은 증거가 고소인의 주장과 반대되는 상황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성범죄의 영역에서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듯했다. 수사기관이 피의자의 유죄를 입증해야 마땅한데 되려 고소인의 진술만으로 이미 유죄는 추정되는 것처럼 보였고 의뢰인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느라 삶이 파탄에 이르렀다.

고통스럽고 힘든 수개월의 시간을 견뎌낸 뒤에 다행스럽게도 검찰에서 무혐의 결정이 내려졌다. 하지만 의뢰인은 아직까지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고 공황장애와 대인기피증에 시달린다고 했다. 소소한 일상을 누리고 싶지만 예전으로 돌아가기 쉽지 않다고 호소하는데 마음이 아려왔다.

대법원에서 '성인지 감수성'이란 용어를 판결문에 직접 언급한 것은 2018년경의 일이다. 딱딱한 시멘트 같은 법률용어에 익숙했던 검사들은 감수성이라는 용어에 외계어를 접하는 듯한 당혹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성폭력 재판부를 담당했던 선배 검사가 당혹스러워하던 기억이 선하다. 증거가 부족한 사건들이 너무 쉽게 기소되는 것 같다고 걱정을 했는데, 그런 사건들이 연달아 유죄가 선고되고 실형까지 선고된다는 것이었다.

"이게 유죄라는데? 검사하기 쉽고 만"이라며 헛웃음을 짓던 장면은 잊혀지지 않는다. 다른 검사들은 감수성이 부족한 것 아니냐며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검사조차 무죄의 의심을 두고 바라보는 사건이 쉽게 유죄가 선고되는 것은 도통 적응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는 모두 감수성이 풍부해진 것일까.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In dubio pro reo)라는 법언 대신 '의심스러울 때는 피해자의 진술로'라는 말마저 들려온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고 호통치던 규문주의 시대에는 피고인이 스스로 무고함을 입증하지 못하면 죄인이 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그와 다를 바 없는 일들이 만일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반갑게 마주쳤던 의뢰인은 내게 '생명의 은인'이라며 연거푸 감사하다고 했다. 물론 그보다 기쁜 말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무죄를 밝히기 위해 생명까지 거는 절박한 심정이었음을 잘 알기에 그저 기쁠 수만은 없었다. 죄가 없어 무죄 판단을 받는 당연한 일이 생명의 은인으로까지 표현되는 장면은 어색하고 낯설 뿐이다.

성인지 감수성을 언급한 판결은 결코 무죄추정의 원칙과 증거재판주의 등 형사소송법의 대원칙들을 배제하거나 등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사와 재판의 실체에서 그러한 판결의 취지가 합당하게 반영되고 있는 것인지 엄격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성범죄를 다루면서 마주했던 성인지 감수성 시대의 씁쓸한 장면들이 그저 일개 변호사의 편협한 걱정에 머무르기를 바란다.
/신기용 법무법인 윈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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