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하추동]선운사 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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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하추동]선운사 동백

백향기 대전창조미술협회 회장

  • 승인 2024-03-26 17:08
  • 신문게재 2024-03-27 18면
  • 임병안 기자임병안 기자
백향기
백향기 대전창조미술협회 회장
주말에 선운사에 다녀왔다. 그 전 주말에는 양산 통도사의 홍매화가 지천으로 피었다는 소식과 함께 온통 붉게 물든 사진이 마음을 설레게 했었다. 양산까지는 길이 멀어 감히 엄두를 못내고 있다가 불현듯 차라리 동백을 보러 가자 하고 서천의 마량진 동백정으로 길을 떠나 동백꽃을 보고 온 터였다. 수령이 500년이나 된 동백들이 언덕을 가득 채워 꼭대기의 정자까지 가는 길을 에워싸고 있고 그 동백 언덕길을 지나니 갑자기 펼쳐지는 바다가 가슴 한가득 밀려 들어왔다. 이제 막 피어 나기 시작하는 어린 동백꽃들은 바다를 배경으로 반짝거리는 초록의 이파리들과 함께 원색의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꽃들이 너무 어려서 겨울을 벗어나지 못한 쌀쌀한 날씨에 속살을 내밀고 있는 여린 꽃들이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 바깥은 쌀쌀한데 여린 속살을 내밀고 있는 모습이 아직은 세상 풍파를 겪지 않아도 될 터인데 너무 일찍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애잔한 마음과 초록의 이파리와 이루는 보색의 아름다움, 바다의 풍광과 어우러지는 낭만적 서정이 뒤섞여서 묘한 느낌이었지만 즐거운 여행이 되었다. 어린 동백꽃을 흠뻑 보고 왔는데 한 주일 내내 무엇인가 아쉬운 마음이 한켠에 남아서 알 수 없는 미련이 없어지지 않았다. 만개한 동백꽃을 보고 싶기도 하고, 동백은 한 때라서 이 시기를 놓치면 이파리 사이로 가득 달린 꽃과 그 아래 송이 채로 뚝뚝 떨어져 혼절하듯 누워 있는 빨간 꽃들이 만들어 내는 묘한 대조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마음 때문에 조금 더 남쪽으로 가면 만개한 동백을 볼 수 있으려니 하고 일주일 만에 다시 선운사로 길을 잡은 것이다. 선운사는 동백꽃과 떨어져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곳이다.



미당은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디다' 하는 가슴 아리는 절절함을 이야기하고, 김용택 시인은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고 노래하고 있으니 선운사 동백은 가슴깊이 박히는 그리움이나 북받치는 설움을 감싸주는 애절함이 있는 모양이다. 그런 마음 때문에 선운사 동백이 성급하게 다 떨어져 버릴까 조바심이 났던 것이다. 선운사는 여러 차례 가본 적이 있지만 정작 동백꽃이 피는 계절에 맞추어 가본 적이 없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노래이든 시이든 선운사의 동백은 모두 절절한 그리움이나 이별이나 덧없음을 노래하는 공통점이 있으니 굳이 그런 절절함을 일부러 찾아가서 느끼고 싶으랴 하면서도 가끔 그런 가슴 절절함을 느끼고 싶을 때가 있지 않는가? 그런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젖고 싶거나 날 저무는 저녁의 황혼을 바라보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도착하니 때가 늦어 저녁 기운이 스미기 시작하는데 선운사까지 이어지는 긴 물길 따라 고목이 늘어서서 마음을 가다듬게 한다. 대웅전 뒤 언덕은 그야말로 아름드리 동백으로 가득 차서 장관을 이룬다. 붉은 동백꽃들이 제법 달리기 시작하였지만 아직 제 몸을 던져 바닥을 붉게 물들이기 전이다. 오래된 절집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묘한 대조를 이루어서 마치 침착하고 담담하게 그린 그림에 선홍색 유화 물감을 붓 한가득 듬뿍 담아 점점이 두텁고 선명한 마띠에르를 만들어 놓은 것같다. 또 빛 바랜 흑백 사진에 꽃들만 빨갛게 색을 드러내고 있는 것같다. 저녁 어스름이 깃든 조용한 절집 마당 뒤로 돌아가면 이런 호사와 화려한 색의 향연이 펼쳐져 있다. 둘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묘한 대조를 이루어 낸다.



시인 정웅은 '호시절 다 놓치고/ 하필이면 설한에 꽃이라니?/ 몸져눕나 싶더니 /철렁, 혼절하고 마누나..' 하는 가슴 철렁한 시를 썼지만 그 시가 내게는 '호사스러운 곳 다 마다하고 하필이면 고즈넉한 절집에 붉은 꽃이라니?' 하는 글로 바뀌어 들렸다. 고즈넉하고 정돈된 마음으로 살아 가려니 다짐하고,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세상에 흔들리거나 동요하지 않고 사는 담담한 마음이 중요하다고 늘 생각하지만 가끔 이런 가슴 저리는 호사, 이런 흔들림은 필요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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