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왜 사과를 해야 하는가

  • 오피니언
  • 세상읽기

[세상읽기] 왜 사과를 해야 하는가

  • 승인 2025-04-16 17:48
  • 신문게재 2025-04-17 18면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PYH2025041115510001300_P4
연합뉴스 제공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겨울방학을 앞두고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마지막 수업시간에 우리에게 자습을 하라고 했다. 말하자면 노는 시간을 줬다. 곧 방학이라 모두 들떠서 짝꿍과 소곤소곤 얘기하거나 장난을 치면서 시간을 보냈다. 선생님도 교실 한 가운데에 있는 난로 앞에 앉아 한가롭게 불을 쬐었다. 나는 같은 반 친구한테 빌린 동화책을 읽고 있었다. 선생님이 이런 날 보고 책을 빼앗아 난로 뚜껑을 열고 불 속에 넣어버렸다. 책이 불 속에서 활활 탔다. "수업시간에 이런 책이나 보고…." 나는 너무 놀라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날 밤 악몽을 꾸었다. 겁이 나서 친구에게는 아무 말도 못했다.

윤석열의 핵심 측근이었던 장제원 전 의원이 지난달 말 사망했다. 장제원은 부총장 시절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던 중이었다. 장제원은 내내 혐의를 부인하다 피해자의 결정적 증거가 공개되자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유서엔 피해자에 대한 사과 한 마디 없었다. 장제원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정치권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권성동, 나경원을 비롯한 국민의힘 의원들은 '가슴이 아프다', '죽음으로 업보를 감당했다'는 둥 일제히 장제원에 대해 애도했다. 그것도 모자라 10년간 고통을 견뎌왔을 피해자를 피의자의 사망원인으로 몰아 2차 가해를 저질렀다. 5년 전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의 사망은 국민들에게 충격을 줬다. 오랫동안 인권변호사로 활약해온 박원순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이런 그가 비서를 강제로 성추행했다니. 더구나 이렇다 저렇다 말 한마디 안하고 바로 죽어 버리다니. 장제원, 박원순은 어떤 마음으로 죽음을 택했을까.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문형배 헌재소장의 선고 요지 마지막 이 한 문장으로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국민들은 전율했다. 12·3 이후의 두통과 불안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내란몰이만 믿고 날뛰다가 황소 발에 밟혀 죽는 개구락지 신세"라고 쉰 목소리로 헌재를 모욕하던 장동혁의 표정이 궁금했다. 헌법재판관의 전원 일치로 파면된 윤석열은 말이 없었다. 며칠 뜸을 들인 후 한다는 말이 가관이었다. "나라의 엄중한 위기 상황을 깨닫고 자유와 주권 수호를 위해 싸운 여러분의 여정은 대한민국의 위대한 역사로 기록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지와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어이가 없었다. 무식하고 무능하고 판단력·통찰력은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어리석은 인간. 그러니 죽이지 못해 안달하던 이재명에게 대권가도라는 레드카펫을 제대로 깔아주는 것 아닌가. 이재명은 '이게 웬 떡이냐' 싶었을 게다.

다시, 장제원·박원순은 왜 사과하지 않고 숨졌을까. 정치생명은 끝났구나 싶어서?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일말의 양심으로? 나종호 예일대 정신의학과 교수는 '유퀴즈'에서 "자살이 명예로운 죽음으로 포장되고 면죄부인 것처럼 여겨선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 우리는 잘못을 저지른 정치인에게 끊임없이 사과를 요구한다. 어떤 이는 끝까지 사과를 거부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마지못해 사과하기도 한다. 정치인의 사과는 다분히 정치적이다. 5·18 학살자 전두환은 국민에 사죄한 적이 있지만 누구도 그의 진정성을 믿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거짓말을 일삼고 국민을 우롱하면서 뻔뻔하게 잘 먹고 잘 살다 죽었다. 전두환의 아바타 윤석열은 잘못을 뉘우칠까? 서초동 관저 앞에서 트럼프처럼 빨간 모자를 쓰고 "다 이기고 돌아왔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파면된 주제에. 그에게 사과 받기란 애저녁에 글러 먹은 것 같다.



이제야 지면을 빌려 친구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당시엔 친구를 피하는 데 급급했다. 또 그 선생은 그날을 기억이나 할까? 에피소드 하나. 8살 때 옆집에서 TV 드라마 '신부일기'를 보던 중 이해할 수 없는 낱말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극중 아내가 남편에게 말했다. "고모님께 사과하세요." 사과? 내가 아는 사과는 명절에나 먹는 맛있는 과일이었다. 그런데 사과를 '하라'고? 아, 혹시 윤석열도 사과의 의미를 모르나? 사과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상처를 치유하고 성찰하는 길이다. 하여 사과 없는 용서는 무의미하다. <지방부장>
우난순 수정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서구 괴정동서 20대 남성 전 연인 살해 후 도주
  2. [사설] 광역교통사업도 수도권 쏠림인가
  3. 과기계 숙원 'PBS' 드디어 폐지 수순… 연구자들 "족쇄 풀어줘 좋아"
  4. 등목으로 날리는 무더위
  5. 이재명 정부 첫 '시·도지사 간담회'...이전 정부와 다를까
  1. 의대생 복귀 방침에, 지역 의대도 2학기 학사운영 일정 준비
  2. 농식품부 '인공지능 융합 미래 식·의약 첨단바이오 포럼' 개최
  3. [대입+] 정원 감소한 의대 수시, 대응 전략은?
  4. '전교생 16명' 세종 연동중, 5-2생활권으로 옮긴다
  5. [춘하추동]폭염과 열대야,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헤드라인 뉴스


이대통령 "지역균형발전, 성장위한 불가피한 생존전략"

이대통령 "지역균형발전, 성장위한 불가피한 생존전략"

이재명 대통령은 30일 "지역균형발전은 대한민국 성장을 위한 불가피한 생존전략"이라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비상경제점검 TF 3차 회의에서 이같이 말했다. 대선 과정에서부터 강조한 5극(5개 초광역권) 3특(3개 특별자치도) 등 국가균형발전 국정 기조를 이어가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그러면서 "공정한 성장을 통해 대한민국 모든 문제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양극화를 완화해 나가겠다"며 갈수록 심각해 지는 수도권 1극체제 극복을 위한 노력할 것임을 시사했다.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성장 전략..

"법 사각지대가 만든 비극"…대전 교제폭력 살인에 `방지 법 부재` 수면 위
"법 사각지대가 만든 비극"…대전 교제폭력 살인에 '방지 법 부재' 수면 위

대전 괴정동 전 연인 살해 사건으로 교제폭력 특별법 부재, 반의사불벌죄 문제가 또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사건 한 달 전 피해자가 가해 남성의 폭행에도 처벌을 원치 않았고 경찰의 안전조치 권유도 거절했으나, 그 기저에는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피해자 의사와 관계없이 가해자를 처벌하고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는 장치가 시급하지만 관련 법 제정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30일 중도일보 취재 결과, 대전 서구 괴정동의 주택가에서 A(20대)씨가 전 연인 B(30대·여성)씨를 살해한 혐의로 경찰에..

세종시 `상가 공실 해소` 칼 뺐다… 업종 확대 등 규제 완화
세종시 '상가 공실 해소' 칼 뺐다… 업종 확대 등 규제 완화

상가 공실로 몸살을 앓고 있는 세종시가 상가 허용 업종을 대폭 확대하고, 관광숙박시설 입점 조건을 완화한다. 지구단위계획 변경을 통해 상가 활성화를 저해하는 '족쇄'를 일부 풀겠다는 전략인데, 전국 최고 수준인 상가공실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중도일보 7월 5일 온라인 보도> 세종시는 행복도시 해제지역의 상가공실 해소와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관련 지구단위계획 결정(변경)을 고시했다고 30일 밝혔다. 이번 지구단위계획 변경은 상가의 허용업종 확대, 일반상업지역 내 관광숙박시설 입지 허용(총 8필지..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이동 노동자 위한 얼음물 및 폭염 예방 물품 나눔 이동 노동자 위한 얼음물 및 폭염 예방 물품 나눔

  • ‘대전 0시 축제 구경오세요’…대형 꿈돌이 ‘눈길’ ‘대전 0시 축제 구경오세요’…대형 꿈돌이 ‘눈길’

  • 물감을 푼 듯 녹색으로 변한 방동저수지 물감을 푼 듯 녹색으로 변한 방동저수지

  • 등목으로 날리는 무더위 등목으로 날리는 무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