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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대전 전투를 기록에서 호동과 부사동으로 각각 안내되는 보문산 적의 첫 기습장소로 추정되는 대사동 보문산공원로 모습. (사진=임병안 기자) |
24일 김대겸 대전시의사회 효촌푸른의원 원장과 김태진 건양대 군사학과 교수가 공동 연구에 따르면, 딘 소장 구출작전처럼 오류가 재생산돼 기억을 만드는 왜곡 현상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1950년 7월 10일 세종시 전의전투에서 지휘관 빅슬러 중위의 활약에 대해 국방군사편찬연구소의 '오산-대전전투'는 그와 그의 소대는 적에게 포위되어 도망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참호 속에서 전사했다고 기술했다. 또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의 '한국전쟁사'에서도 빅슬러 소대장을 비롯한 소대원 전원이 옥쇄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공동연구자들은 빅슬러 중위는 그해 7월 19일 포탄 파편에 부상을 당해 부상자에 등록되었을 뿐 전사한 사실이 없고, 7월 31일 부대에 복귀해 1966년 소령으로 예편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또 부대원 모두 전사했다는 국내의 기록과 달리 181명 중대원 중 당시 3일간의 전투에서 27명이 희생됐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에서는 대전에서 철수작전을 시작한 7월 20일 미 제24사단 제34연대 제1대대장이 보문산에서 기습을 당한 지점에 대해서도 재검증했다. 해당 지점은 북한군의 대전포위가 시작된 시점에 대규모의 적이 아군 눈에 띄지 않고 시내에 침투해 대전 남쪽 도로 봉쇄를 준비한 장소로 여겨지는 중요한 장소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사'에서는 피격 지점은 호동(보문산 동북쪽 2.2km)이라고 지목하고 '오산-대전 전투'에서는 지도를 통해 호동보다는 서북쪽에 위치한 부사동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보도된 운전병의 증언을 담은 기사에 따르면 제1대대장 아이레스 중령이 타임지의 필더 종군 기자 등을 대동하고 14대의 지프차로 이동했던 것으로 파악돼 당시 임도가 개척되지 않은 호동과 부사동 아닌 지금의 대사동 '보문산공원로'가 아이레스 일행이 기습당해 필더 기자가 전사하는 등의 피해를 당한 곳으로 추정된다.
보문산 남동쪽 적의 이동을 차단하기 위해 150명의 병력으로 이동 중 적탄에 목에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된 1대대 부대대장 던햄 소령의 교전지는 구안리가 아니라 무수동 구완리 계곡이고, 전사자 있었다는 주민 증언까지 수집됐다.
특히, 6·25때 경북 문경을 가로지르는 영강에서 촬영된 사진이 갑천 전투로 소개된 것을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활동가들이 바로잡고, 김재현 기관사의 순직일 오류와 증기기관차 미카219호를 동원한 작전은 딘 소장의 구출이 아니라 물자 후송 목적이었음을 일찍이 규명했다.
이 분야 연구의 김대겸 원장은 "외국의 전사록을 국내 문헌으로 편역하는 과정에서 시기나 발생 사건을 원전에서는 모호하게 언급했으나, 국내에 인용할 때는 구체적인 사실로 기록하면서 오류가 발생하고 재생산된 사례가 있다"라며 "다른 연구자의 분석처럼 6·25전쟁에 관한 연구를 오히려 다른 나라 연구 자료에 의지하는 기이한 현상을 극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라고 설명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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