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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게티이미지뱅크, 본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 |
사건 한 달 전 피해자가 가해 남성의 폭행에도 처벌을 원치 않았고 경찰의 안전조치 권유도 거절했으나, 그 기저에는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피해자 의사와 관계없이 가해자를 처벌하고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는 장치가 시급하지만 관련 법 제정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30일 중도일보 취재 결과, 대전 서구 괴정동의 주택가에서 A(20대)씨가 전 연인 B(30대·여성)씨를 살해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전날 범행 현장에서 발견한 휴대전화와 B씨가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6월까지 A씨 관련 112신고를 4차례 한 것을 토대로 둘이 연인 관계였고 만남과 이별을 반복해왔던 것으로 보고 있다.
문제는 지난 6월 27일에 발생한 4번째 신고 후 조치다. 당시 편의점에 있던 A씨가 타인과 시비가 붙었고 출동한 경찰까지 폭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B씨에게도 손목을 잡고 협박하는 등 물리적 폭력을 행했다. 당시 경찰은 공무집행방해죄와 폭행죄 혐의로 A씨를 입건했다. A씨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B씨는 폭행에 대한 처벌불원서를 경찰에 제출했다. 폭행죄는 반의사불벌죄에 해당해 피해자가 원치 않는다고 하면 가해자 처벌을 할 수 없다. A씨가 유치장에 입감되고 나서 처벌불원서를 제출했기 때문에 경찰은 협박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봤다. B씨는 긴급상황 시 신고가 가능한 스마트워치 착용 권유도 2차례 거절했으며, 이후 경찰의 연락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규정상 경찰의 안전조치는 대상자가 원치 않는다고 하면 집행할 수 없다. 전날 범행은 A씨가 유치장에서 나와 경찰의 추가 조사를 앞둔 상황에서 벌어진 것으로 파악됐다.
전문가들은 B씨의 행동을 두고 용서나 연인 간 애정에 의한 것으로만 보지 말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집, 직장, 가족, 개인 정보 등 사적인 것까지 공유하는 만큼 대부분의 교제 폭력 피해자들이 심리적 압박과 보복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앞서 B씨의 3차례 112 신고 내용 중에는 A씨가 식당에서 행패를 부려 재물 손괴 죄로 입건되거나, 피해자의 오토바이를 돌려주지 않아 접수된 것도 있었다. 피의자의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성향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정현주 대전YWCA성폭력가정폭력상담소장은 "피해자들을 상담해보면, 가해자를 용서하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위협적이고 공포스러운 상황을 모면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크다"라며 "자신의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가해자가 자신 또는 가족이나 지인까지 해코지를 할 지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피해자에게 처벌 의사를 묻는 현행법은 분명 문제"라고 지적했다.
더 큰 문제는 B씨가 경찰에 보호조치를 요청했어도 스마트워치 제공, APO 연락 외에는 사실상 방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교제폭력은 가해자를 엄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법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경찰 조사에서 A씨의 스토킹 정황은 포착되지 않았는데, 피해자와 가해자의 주거 분리·보호 등 응급조치 역시 스토킹 혐의가 있어야지만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여성계에서 반의사불벌죄 폐지와 교제폭력 특별법을 촉구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교제폭력 특별법 제정은 경찰청 본청에서 국회에 법 제정을 요구를 해왔으나 여전히 부재하다. 피해자의 심리적 불안 해소를 위해 수사당국과 전문 상담기관의 연계 지침도 필요한 상황이다.
대전 경찰에 따르면, 지난해 교제폭력 112신고 건수는 3225건이 접수됐고 매해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유선화 여성긴급전화 1366대전센터장은 "올해 5월까지 교제폭력, 스토킹으로 인한 접수된 상담 역시 259건으로 전년 동기(208건)보다 늘었다"며 "반복되는 교제 폭력·살인을 막기 위해선 관련 법 제정이 시급하다. 교제폭력은 피해자들이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최근 여성가족부에서 자가진단 체크리스트를 배포했는데, 의심될 경우 전문 상담기관의 도움을 받길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정바름 기자 niya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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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가족부 교제폭력 진단 체크리스트 (출처=여가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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