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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식 기자<사진=김정식 기자> |
여름 내내 쏟아진 폭풍우와 수해를 견뎌낸 땅 위에서, 그것은 농부의 마음을 쓰다듬는 가장 부드러운 손길이다.
올해 경남 곳곳의 7월은 극한 호우로 집과 논밭이 허물어지고 사람들 마음까지 깊게 패였다.
무너진 둑과 쓸려간 토사 위에 다시 햇살이 들자, 곡식은 쓰러진 채로도 알을 맺고, 나무는 꺾여도 끝내 새싹을 틔웠다.
자연의 광폭함은 두렵지만, 그 안에서 살아남은 흔적은 다시금 사람을 일으켜 세운다.
역사 속에서도 흰 이슬은 늘 회복의 신호였다.
삼한의 제사장들은 백로 무렵에 곡식이 익는 것을 보고 신의 뜻을 읽었고, 조선의 농서 《농가월령가》에는 백로를 수확의 때로 기록했다.
폭풍과 흉작의 공포가 있어도, 결국 이슬은 다시 내려 풍요의 계절을 열었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백로의 요정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계가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징표, 곧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조용한 선언이다.
씨를 뿌리고, 비바람과 해충의 시련을 견디며, 마침내 알곡을 맺게 하는 보이지 않는 손길은 인간이 만든 제도나 장치보다 더 크고 깊은 위로를 건넨다.
어떤 농부들은 말한다.
무너진 논두렁에 맺힌 이슬방울을 보고, '아직 이 땅이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얻는다고.
그것은 위로이자 다짐이며, 동시에 다시 쟁기를 잡게 하는 신비한 힘이다.
백로의 흰 이슬은 결국 작은 요정의 눈물과 같다.
울부짖는 농부의 곁에서 함께 흐르고, 기쁨의 순간에는 반짝이며 웃는다.
그 존재는 극한의 재난마저 부드럽게 녹여내며, 다시 시작할 힘을 남긴다.
새벽 논두렁에서 반짝이는 이슬을 바라보면 깨닫게 된다.
무너진 마을과 꺾인 삶에도 여전히 작은 결실은 남아 있고, 그 결실은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농부의 가슴에 뿌리내린다는 사실을.
백로의 요정은 그렇게 말한다.
"당신이 견뎌냈으니, 이제 익어가라"고.
경남=김정식 기자 hanul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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