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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흥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바이오파운드리사업단 책임연구원·사무국장 |
박테리오파지를 단순한 세균 잡는 도구를 넘어 최첨단 신약 개발 플랫폼으로 끌어올린 결정적인 기술은 바로 '파지 디스플레이'이다. 이 기술은 파지 연구 중 가장 혁신적인 사례 중 하나로 꼽히며, 2018년 노벨 화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줄 정도로 생명과학 분야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파지 디스플레이의 핵심 원리는 매우 간단하면서도 천재적이다. 박테리오파지의 유전자를 조작하여 파지의 표면 단백질에 원하는 외부 단백질(예: 항체 조각, 펩타이드, 효소 등) 을 부착되게 '전시'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마치 상점 진열대에 수많은 제품을 올려놓는 것처럼, 파지 하나하나의 표면에 다양한 종류의 단백질을 붙여 거대한 파지 그룹을 구축할 수 있다. 이 그룹에서 우리가 원하는 특정한 표적(예, 암세포 표면 단백질) 에 가장 강력하게 결합하는 파지를 선별해 내는 과정이 파지 디스플레이 기술이다. 수십억 개에 달하는 파지 중 오직 원하는 대상에만 찰떡같이 달라붙는 파지를 골라내고, 이 파지가 가지고 있는 유전 정보를 분석하여 대량 생산하는 것이다.
이 기술의 가장 눈부신 성공 분야는 바로 항암 항체 치료제 개발이다.
파지 디스플레이를 이용해 인간 항체의 수많은 변이체를 파지 표면에 전시하는 항체 그룹을 만든다. 이 그룹 속에는 인간의 면역 체계가 만들어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항체 조각을 포함한다. 이 거대한 그룹을 암세포와 같은 특정 대상에 노출시킨다. 대상에 강력하게 결합하는 파지만을 반복적으로 '낚아채는(Panning)' 과정을 통해, 기존 방법으로는 찾기 어려웠던 고효율, 고 특이성 항체를 신속하게 발굴할 수 있다. 파지 디스플레이 기술로 탄생한 대표적인 성공 사례는 최초의 인간화 단일 클론 항체의약품인'휴미라' 개발이다.
파지 디스플레이로 그 가능성을 확인한 과학자들은 파지 자체를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박테리오파지는 구조가 안정적이고, 대량 배양이 쉬우며, 표면에 원하는 단백질이나 물질을 정교하게 부착할 수 있는 나노 크기의 캡슐 또는 골격으로서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최근 이 파지의 골격적 특성을 활용한 혁신적인 기술 사례들이 지속적으로 발표되고 있다. 파지는 인체 세포에 해를 끼치지 않는 안전성 때문에 파지 입자를 약물을 운반하는 나노 운반체로 사용하는 연구가 활발하다. 파지 표면에 암세포 또는 특정 조직에만 결합하는 결합 단백질을 붙이고, 파지 내부 또는 표면에 항암제나 유전자 치료 물질을 탑재시킨다. 이 파지 나노 운반체는 마치 내비게이션이 장착된 택배차처럼, 건강한 세포는 건드리지 않고 오직 병변 부위에만 정확하게 약물을 전달하여 치료 효과를 극대화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 이는 기존 항암제의 가장 큰 문제점인 전신 부작용을 해결할 수 있는 혁신적인 접근법이다. 파지 표면에 어떤 물질을 결합하느냐에 따라 진단, 생체 내 이미징, 백신 등으로 응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심지어 희토류 금속만 특이적으로 붙는 파지를 개발해 희토류 금속을 대량으로 확보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었다. 파지 디스플레이를 통해 수많은 항암 항체 의약품의 설계도를 제공했으며, 파지 나노 입자는 정교한 약물 전달, 초정밀 진단, 그리고 차세대 백신 개발의 핵심 골격이 되고 있다. 박테리오파지를 재조명하고 활용하려는 과학자들의 노력은 인류에게 큰 희망을 선사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박테리오파지라는 작은 바이러스 덕분에 슈퍼 박테리아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암과 같은 난치병을 정밀하게 치료하며, 더 건강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이 '세균을 먹는 바이러스'의 끝없는 잠재력은 앞으로도 수많은 혁신 사례를 창출하며 인류의 건강 청사진을 밝게 비춰줄 것이다. /정흥채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바이오파운드리사업단 책임연구원·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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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