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하추동]'대전'을 근대의 틀에 가두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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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하추동]'대전'을 근대의 틀에 가두지 마라

이상근 (재)문화유산회복재단 이사장

  • 승인 2026-03-31 17:36
  • 신문게재 2026-04-01 18면
  • 임병안 기자임병안 기자
이상근 이사장
이상근 (재)문화유산회복재단 이사장
6.3 지방선거 일정이 진행 중이다. 충남대전은 통합특별시 출범이 유보된 속에서 각각의 광역단체장을 선출한다. 통합 무산의 아쉬움이 크지만, 한편으로 '정체성'보다는 양적 팽창과 경제적 이익만을 중시한 통합 논의가 멈추고, 지금보다 더 깊고 넓은 '충청특별시'의 미래를 생각하면 다행일 수도 있겠다 싶다. 향후 '충청특별시'에 있어서도 '대전'은 중핵 도시가 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앞으로 준비할 대전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대전은 흔히 '철도와 함께 태어난 근대 도시'로 정의된다. 1905년 경부선 개통과 함께 허허벌판에서 일어선 도시라는 서사는 대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문법이었다. 하지만 이 서사에는 치명적인 함정이 있다. 100여 년의 근대사 이면에 숨겨진 수천 년의 '축적된 시간'을 삭제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역사는 잠시 은닉될 수는 있어도, 결코 인위적으로 가공하거나 지울 수 없다. 이제 대전은 '근대'라는 좁은 틀을 벗어나,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역사문화자산의 보고로서 재정의해야 한다.



대전 지표면 아래에는 구석기부터 청동기, 철기에 이르는 방대한 선사 유적이 잠들어 있다. 괴정동에서 출토된 청동기 유물들은 당시 이 지역이 한반도 금강 유역의 핵심 권력 중심지였음을 증명한다. 둔산동 유적 역시 대전이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가 정착하기 최적의 조건을 갖춘 '준비된 터전'이었음을 말해준다. 더 나아가 대전은 '고대 산성의 도시'다. 계족산성을 비롯해 도시 전체를 에워싼 40여 개의 산성은 백제와 신라가 명운을 걸고 다퉜던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보여준다. 근대가 대전의 '확장기'였다면, 고대는 대전의 '뿌리'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찬란한 역사적 층위를 '근대 도시'라는 매끈한 포장지로 덮어버린 채 살아왔다.

안타깝게도 대전의 풍부한 역사적 실체와 시민들이 체감하는 문화적 자부심 사이에는 거리감이 존재한다. 대전시립박물관은 지역의 역사를 담아내기에 유산의 양과 질 면에서 부족하다는 지적을 면치 못하고 있다. 더욱 뼈아픈 사실은 대전이 세종, 제주와 함께 국보가 단 하나도 없는 '문화유산 변방'으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물론 국보의 유무가 도시의 가치를 전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는 대전의 유물을 대전이 지키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대전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핵심 자산들은 국립중앙박물관이나 타 지역에 흩어져 있다. 흩어진 역사를 다시 모으고 그 가치를 제대로 조명하는 것은 지금 세대의 의무다.

대전이 지향하는 '유네스코 창의 도시'는 단순히 '과학기술'이라는 현대적 성과에만 기대어서는 안 된다. 유네스코가 주목하는 창의성은 과거의 자산을 어떻게 미래 가치로 전환하느냐에 달려 있다. 대전의 고대 산성 문화와 선사 유적은 '과학도시'라는 브랜드와 결합할 때 비로소 독창적인 스토리를 갖게 된다. 부끄럽게도 현재 유네스코 창의도시 네트워크에 가입한 한국의 도시는 13곳이나 대전과 충남은 단 한 곳도 없다.

대전은 고대부터 이어진 치열한 삶의 흔적 위에 근대의 역동성이 덧칠해진 캔버스와 같다. 역사를 가공하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중층적인 역사를 회복해야 한다. 고대 산성의 기백과 선사 시대의 생명력, 그리고 근대의 개척 정신이 공존하는 도시. 이것이 대전이 유네스코 창의도시로서 세계에 내놓아야 할 진정한 모습이다. 우리 곁에 숨겨진 역사를 깨우는 일, 그것이 광복 100주년을 향해 나아가는 대전의 새로운 백년대계가 될 것이다. /이상근 (재)문화유산회복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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