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 여름의 부조리한 시간을 건너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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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여름의 부조리한 시간을 건너며

김태열 수필가

  • 승인 2026-08-31 17:16
  • 신문게재 2026-09-01 23면
  • 방원기 기자방원기 기자
풍경소리 김태열 수필가
김태열 수필가.
올여름은 뜨거웠다. 그렇게 더위가 심할 줄은 몰랐다. 가마솥더위라는 표현이 피부의 감각으로 생생히 전해졌다. 세상이 그 압도적인 무더위의 힘 앞에 그냥 침몰할 뿐이었다. 자연의 운행은 우리의 기대나 의미 부여와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의 길을 갈 뿐임을 새삼 확인하였다. 이것을 지금으로부터 이천오백여 년 전의 노자께서는 '천지의 운행은 어질지 않다'(天地不仁, 도덕경 제5장)고 알려주었다. 천지는 말이 없고 인간은 시끄럽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다. 바깥이 벽처럼 닫혀 있을 때는 내면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 점에서 더운 여름은 책과 친구 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옛 선인들은 더위를 피해 시원한 곳으로 가서 책과 씨름했다고 한다. 삼복더위에 공부한다고 엉덩이가 다 물러터졌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금이야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앞에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세상이 어디 있겠는가.

집에서 책을 보면 전기료가 만만찮아 오후에는 피서라도 가는 셈 치고 카페로 길을 나선다. 글자 그대로 독서 피서다. 여름날 결성한 독서 모임에서 실존주의 문학가인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두 사람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나갈 것이냐를 고민했다. 제1·2차 세계대전이라는 부조리를 겪어도 세상에 내놓는 처방은 달랐다. 사르트르가 인간 존재의 자유와 책임에 주목했다면, 카뮈는 세계의 부조리와 반항에 초점을 맞추었다. 두 사람이 펼친 사유들은 거대한 태풍으로 다가오는 AI 시대에 서늘한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사는 게 의미 있는 삶이냐고.

개인들은 망망대해에 표류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어디로 향해가는지를 알 수 없으니 남들이 많이 타고 있는 배에 올라탄다. 개인의 실존 그 자체에 주목한 이는 사르트르다. 그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며 실존주의 문학의 시작을 알리는 『구토』라는 책을 지었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던져진 존재, 타인은 나의 고통이자 거울이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관습, 역할이나 이름에 의해 갇힌 틀에서 벗어날 때 다가오는 존재의 '우연성'과 '잉여성'으로 구토를 느낀다고 했다. 그에 반해 부조리한 세상에서 카뮈는 『시지프 신화』의 시지프처럼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30대의 작가들이 쓴 『이방인』과 『구토』는 철학적 함의를 가진 문장들이 많아 난해했다. 돋보기를 써야 책을 볼 수 있는 나이에 3번이나 읽고서 독후감을 쓰는 시간은 힘들었다. 하지만 무더위를 이겨낸 행복한 피서법이었다.

세상은 부조리한 사건을 끊임없이 연출한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폭염 뒤 닥친 거제·통영지방의 극한호우, 베네수엘라와 일본 등에서 연속으로 일어난 지진, 미국과 이란 분쟁, 러·우 전쟁은 끝을 알 수 없는 부조리한 사건이다. 무엇보다 압권은 주식시장이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터지는 서킷 브레이커(circuit breaker)는 여름을 더욱 덥게 했다. 일부 외신은 한국의 주식시장을 국가적 투기장이라고 조롱했다. 주식시장의 변동성이라는 부조리의 심연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간 여름의 시간이었다.

아무리 세상이 우리의 기대를 벗어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버텨야 한다. 그 방법은 세상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그 속에서도 각자의 속도로 흐른다. 자기만의 리듬을 지키는 사람은 타인의 시간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홀로 길을 걸어가면서 자신의 시간을 새길 뿐이다. 비록 세상의 관점으로 쓸모없는 나무처럼 보일지라도 마음은 홀가분하다. 한편으로는 상호 연결된 세상에서 사르트르가 말한 나만의 자유가 타인의 희생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음이 착잡해지기도 한다.

반복되는 일상, 매일 거의 똑같은 일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그 무의미함을 알아차리고, 때론 얼토당토않은 사건과 마주치더라도 나만의 의미를 발견해 생의 기쁨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여름 내내 함께한 『구토』와 『이방인』이 가르쳐준 삶의 이정표였다. /김태열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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