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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티 이미지 뱅크 |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이는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뜻으로, 사람의 성장에 있어선 그 환경이 매우 중요함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맹자의 어머니는 남편과 결혼 5년 후에 아들 맹자를 낳았다고 한다.
그러니 그 얼마나 애지중지했을지 충분히 상상된다. 하지만 맹자가 겨우 4살 때 남편이 작고했다고 한다. 고로 과부의 처지에서 그 얼마나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삶을 헤쳐 나왔을까에 대한 연민 또한 묵직한 게 사실이다.
‘맹모삼천지교’에 나오듯 맹모는 공동묘지 인근과 시장을 거쳐 글방 근처로 이사를 하였다. 그랬더니 비로소 맹자가 공부와 예법에도 높은 관심을 보임에 무릎을 쳤다. 맹자 어머니는 이곳이야말로 아들과 함께 살 만한 곳이구나 라고 믿곤 마침내 그곳에 머물러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어머니의 노력으로 마침내 맹자는 유가(儒家)의 뛰어난 학자가 되었다. 또한 그의 어머니는 지금껏 역시도 현모양처(賢母良妻)의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 맹모는 맹모단기(孟母斷機)로도 유명한 여성이었다.
맹자가 고향을 떠나 공부를 하다가 하루는 기별도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베틀에 앉아 길쌈을 하고 있던 맹자의 어머니는 갑자기 찾아온 아들을 보고 기쁘기는 하였지만 감정을 숨기고 물었다. "네 공부가 어느 정도 되었느냐?”
“아직 다 마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맹자의 어머니는 짜고 있던 베틀의 날실을 끊어버리고는 이렇게 꾸짖었다. "네가 공부를 중도에 그만두고 돌아온 것은 지금 내가 짜고 있던 베의 날실을 끊어버린 것과 같은 것이다."
맹자는 어머니의 이 말에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다시 스승에게로 돌아가 더욱 열심히 공부하였다. 따라서 이 부분에 이르면 맹자 모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조선 중기의 소문난 서예가였던 한석봉이 집으로 찾아오자 불을 끈 뒤 글을 쓰게 하고 자신은 떡을 썬 그의 모친이 오버랩 된다.
최근 지인과 대화를 나누던 중, 아들 녀석이 너무나 속을 썩여 고민이 깊다고 하소연을 토로하는 소리를 들었다. 학생의 신분이거늘 공부는 커녕 툭하면 사람을 때리는 등 그 일탈의 정도가 심하다며 나를 많이 부러워하였다.
그래서 딱히 위로의 말이 떠오르지 않기에 “골프와 자식농사는 마음대로 안되는 게 우리네 인생사라고 했지요”라며 얼버무리고 말았다. 하지만 속내는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현모양처’가 있으면 자녀도 마찬가지로 그 현모양처의 의미대로 ‘어진 어머니이면서 착한 (아버지의) 아내’를 본받는다는 것이다.
조심누골(彫心鏤骨)과 설상가상+첩첩산중의 감가불우(轗軻不遇) 탓에 맹모보다 최소한 스무 번도 더 이사(월.전셋집)를 전전했다. 남편인 내가 돈을 지지리도 못 벌었기에 그동안 아내가 겪은 고생은 마치 차마고도처럼 가파르고 험준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두 아이에 대한 어려서부터의 극진한 사랑과 나름의 철저한 밥상머리 교육 병행은 맹모와 한석봉 모친의 그것을 능히 상회했다고 보는 시각이다. 덕분에 두 아이 모두 효심이 바다처럼 깊음은 물론이요 예의 또한 깍듯한 등 주변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자식농사에서 성공했다며 부러워하는 결과의 도출로 나타났다.
탈무드에서 ”착한 아내는 남편에게 둘도 없는 값비싼 보물이다”라고 했다. 쉬는 오늘은 참 오랜만에 아내와 동물원(대전오월드)에 가서 호랑이도 보고 맛난 것도 사먹고 돌아올 요량이다.
홍경석 / <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월간 오늘의 한국> 대전·충청 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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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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