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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 공산성/사진=연합 DB |
지인의 딸이 공주에서 결혼한다는 문자메시지가 왔다. ‘공주라? 그럼 공산성을 또 볼 겸 가야겠군.’ 갑자기 센티멘털리즘으로 바뀐 건 두해 전 봄에 공산성을 찾은 덕분이었다. 그날은 공주에서 초등학교 동창생의 여식이 결혼을 하는 날이었다.
그래서 대전에 사는 친구들 다섯이 모여 한 차에 올라 공주로 출발했다. 결혼식은 오후 1시부터였지만 공산성을 구경할 요량으로 친구들을 일부러 오전 10시에 집합시켰다. “일부러 놀러도 가는데 조금만 일찍 간다면 공산성과 금강을 구경하고 예식을 본 뒤 밥까지 먹을 수 있으니 이런 호사가 어딨겠니?”
“맞어~” “언젠가 밤에 이 근방을 지나치려니 공산성은 밤에 오면 더욱 운치가 있을 듯 싶더라고!” 친구들의 흔쾌한 이구동성이 이어졌다. 이윽고 도착한 충남 공주의 관문에 위치한 공산성(公山城).
화사한 날씨답게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꽤 많았다. 사적 제12호인 공산성은 백제의 수도가 공주였을 때 공주를 지키던 산성이었다고 한다. 금강변 야산의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써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쳤단다.
또한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과 '공산성'으로 불렸으며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도 불린 게 바로 공산성의 '이력'이다. 공산성은 백제의 멸망 직후 의자 왕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으며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아울러 조선시대엔 이괄의 난(1623)으로 말미암아 인조가 피난했던 곳이기도 하다니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방점을 찍을 수 있는 곳이라 하겠다. 공산성 성곽의 총길이는 2660m로 외성(外城)을 제외하면 2,193m나 되는 결코 짧지 않은 길을 자랑했다.
날씨까지 너무 화창한데다가 공산성 정상에서 한 눈에 죄 보이는 금강의 수려한 풍광까지를 음미하자니 친구들은 하나같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와~ 공산성 너무 좋네!” “난 해마다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또 와야지!”
나는 친구들을 웃기자고 이런 농담까지 서슴지 않았다. “옛날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여기도 잠시 오셔서 이런 시조를 한 수 남기신 것을 니들은 아니? ‘공산성 달 밝은 밤에 수루(戍樓)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한 잔 술의 내음은 나의 속을 끓나니……’ 라는.”
친구들의 포복절도가 이어졌다. 공산성을 내려와 예식을 보았다. 주례 선생은 “여기 두 사람은 똑똑한 ‘재자가인’의 인재들이니 반드시 백년해로로 잘 살 것”이란 덕담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제는 아내가 뜬금없이 한 말이 비수로 작용해 마음이 아팠다.
“작년에 결혼한 내 친구 00의 아들 있잖아, 최근 처갓집에서 장인이 큰돈을 줘서 승용차를 고급으로 뽑았대. 나도 돈이 많다면 우리 사위에게 근사한 차를 사주련만.”
사위도 자식이다. 따라서 딸에게 해주는 것처럼 차를 사주고 싶고, 심지어는 멋진 집까지 척척 사주고 싶은 건 장인인 나의 본심이다. 하지만 매달 적자가계를 꾸려나가기에도 헉헉대는 처지이고 보니 마음조차 고작 화중지병(畵中之餠)에 머물 따름이다.
한데 지인은 평소 입에서 침이 튀도록 그의 사위와 딸이 우리 딸과 사위처럼 재자가인(才子佳人= 재능이 뛰어난 남자와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자랑했다. 그러하였으니 그깟 차 한 대쯤이야 멀지 않은 장래에 ‘식은 죽 먹기’로 구입하는 것도 실은 시간문제가 아닐까도 싶다.
그래서 말인데 사위가 운전하는 차에 올라 공산성도 가고, 연꽃들이 만발한 부여의 궁남지도 볼 수 있다면 그 얼마나 폼이 날까!
홍경석 / <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월간 오늘의 한국> 대전·충청 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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