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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년 1월 5일. 1.4 후퇴 당시 서울을 떠나 남으로 향하는 피난민의 행렬./사진=연합 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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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1년 1월 5일. 1.4 후퇴 당시 서울을 떠나 남으로 향하는 피난민의 행렬./사진=연합 DB |
얼마 전 모 기관의 홍보대사로 위촉되었다. 그래서 발대식에 참석했더니 선물까지 주었다. 선물의 내용은 스마트폰 보조배터리였는데 생산지는 물론 중국이었다. 언제부턴가 우리 생활의 깊숙이까지 침범한 게 바로 메이드인 차이나 제품들이다.
이른바 ‘천원 샵’에 가면 가기서 파는 상품의 대부분이 중국산임은 상식이다. ‘중국산 없이 살아보기’라는 방송을 했을 정도로 우린 지금도 알게 모르게 중국산 제품들의 포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조선업과 철강업까지 위기를 맞고 있음은 중국의 약진과 저가공세 때문이다.
중국의 어떤 마구잡이 식 강행군은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전자는 물론이고 자동차와 조선, 항공과 심지어는 화장품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업종에 걸쳐 중국의 주요 기업들이 한국 인재들을 겨냥한 스카우트 전쟁까지 일으키고 있다는 뉴스를 쉬 보는 즈음이다.
최근 더욱 활발해진 중국의 우리나라 인재 영입 전략은 연구개발(R&D)과 소프트웨어, 글로벌 마케팅 등 전문영역에서 핵심 경쟁력을 지닌 소위 'S급'까지를 겨냥하고 있대서 관련기업들이 긴장하고 있다고 한다.
삼성전자와 애플을 뒤쫓는 세계 3위 스마트폰 업체인 중국의 화웨이(華爲)가 삼성전자 출신의 모 전무를 자사의 임원으로 내정했다는 외신은 이런 뉴스의 방점이다. 그래서 이들이 겨냥하여 중국기업으로 영입된 인재들은 일정기간동안은 물론 칙사 대접을 받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단물이 빠진 껌을 계속 씹고 있는 사람이 없듯 그렇게 스카우트된 인재들 역시 결국엔 버림을 받을 게 뻔해 보인다. 중국은 이처럼 기업의 ‘인재 사냥’과 병행하여 미국의 사드(THAD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의 한국 배치 결정을 두고선 노골적으로 보복 운운하고 있어 또 다른 우려의 먹구름을 불러오고 있다.
이에 여당에선 중국을 향해 대국(大國)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라고 비판하였다지만 그들이 이 말을 새겨들을 지는 솔직히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지난 6월 5일 우리나라 서해 NLL을 침범한 중국 어선들을 우리 선원들이 직접 나포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싶어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중국은 북한의 혈맹(血盟)이다. 그래서 북한이 연일 미사일을 쏴대고 전쟁 불사까지 떠들고 있음에도 여전히 ‘너그럽다’.
반면 우리나라에 대해선 자국의 인민일보에 보복까지 운운하는 기사를 쓴 건 분명 우리를 우습게 본다는 뚜렷한 방증이 아닐 수 없다. 영화 ‘국제시장’과 ‘인천상륙작전’에도 나오지만 6.25 한국전쟁 당시 통한의 1.4후퇴는 중국공산당의 개입이 그 원인이었다.
1950년 10월 8일, 미군의 38선 이북으로의 진군 다음 날, 마오쩌둥은 중화인민해방군 북방지역군에게 중화인민의용군 휘하로 편입하여 한국을 침공할 것을 명령하였다. 1950년 10월 15일, 맥아더 장군은 태평양 웨이크 섬(Wake Island)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중공군이 개입하기에는 이미 늦어 침공가능성이 적다는 오판의 의사를 밝혔다.
또한 중공군은 만주에 30만, 압록강변에 10~12만5천 명의 군이 포진해 있으며 그중 반 정도가 압록강을 넘어 남진할 수도 있으나 공중지원 없이 그들이 평양으로 진격할 경우 대패할 것이라고 단언하는 결정적 실수를 저지른다.
1951년 1월, 중화인민의용군과 북한인민군은 제 3단계 공세(중공군 동계 대공세)에 들어가 UN군을 비밀리에 포위, 공격하는 야간전술을 펼쳤다. 공격에는 요란한 나팔과 징이 동원되어 작전전달과 적군을 혼란시키는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전법을 처음 목격한 UN군은 중공군의 동계작전에 압도되어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중공군에 빼앗기게 되었다. 게다가 미8군의 워커 장군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것이 군의 사기저하를 불러오게 되고 이러한 차질에 맥아더 장군은 중국 대륙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후 이로 인해 발생한 방사선 낙진지역을 중공군의 보급로 차단에 이용할 것을 고려하게 된다.
하지만 곧 워커장군의 대체로 투입된 카리스마적인 매튜 리지웨이 중장이 후속 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유혈이 낭자했던 미8군은 곧 다시 회생하기 시작했다. 한국 전쟁에 중국 공산당이 투입한 군사는 자그마치 92만6천 명이나 되어 UN군과 한국군을 모두 합친 것과 비슷한 규모였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중국의 보복 발언과 북한의 연일 포격 연습, 그리고 미국의 사드 배치라는 3중의 어려움에 처해있다. 이러한 현상을 보자면 광해군(光海君)과 강홍립의 ‘중립외교’라는 지난 역사가 어떤 교훈으로 떠오른다. 강홍립(姜弘立)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명나라의 원병으로 5도도원수(五道都元帥)가 되어 후금을 쳤으나 대패하여 후금에 억류되었다. 정묘호란 때 입국하여 조선과 후금의 강화를 주선하였으나 후금에 투항한 역신으로 몰려 사망한 인물이다. 1618년 명나라가 후금(後金)을 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 조정은 새로 일어난 후금의 세력이 만만치 않음을 감지하고 있었고 조정의 내부에서는 원군파병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온 사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파병을 결정하게 되었다.
강홍립은 외교전략과 중국어에 능통해 적임자로 추천을 받아 1만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였다. 그러나 1619년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부차(富車)에서 대패하고, 강홍립은 조선군의 출병이 부득이하여 이루어진 사실을 적진에 통고한 후 군사를 이끌고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는 현지에서의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광해군의 밀명에 따른 것이었다. 투항한 이듬해인 1620년 후금에 억류된 조선 포로들은 석방되어 귀국하였으나, 강홍립은 부원수 김경서 등 10여 명과 함께 계속 억류되었다.
적진에 볼모로 있었지만 밀지를 보내 후금을 상황을 광해군에게 보고하였다고 한다. 강홍립이 후금에 억류된 사이 조선에서는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이 일어나 광해군은 실각하였다. 인조가 등극하였고 대북파 북인(北人)들이 절멸하고 서인(西人)이 정치적 실제로 군림하는 상황으로 변화되어 있었다.
강홍립은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후금군의 선도로 입국하여 강화에서 후금과 조선의 화의(和議)를 주선한 뒤 국내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적지에서 포로로 잡혀 고생한 강홍립을 옹호하는 견해도 있었지만 삼사의 관료들은 그를 후금에 투항한 역신으로 몰았고 모든 관직을 삭탈하였다.
한 마디로 시대의 희생양이 된 셈이다. 중국의 보복 발언은 분명 내정간섭이자 대국답지 않은 치졸함이다. 여하간 우리는 중국에 비하면 일개 변방국가(그들의 시각에서)에 불과하다. 따라서 거안사위(居安思危), 즉 편안히 살 때 위태로움을 생각함을 이르는 말처럼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의 도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국방과 안보엔 여야가 있을 수 없다. 우리 국민들 역시도 기왕이면 다홍치마랬다고 외산보다는 국산제품을 애용하는 습관을 기르는 건 어떨까! 보조배터리 역시도.
홍경석 / <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월간 오늘의 한국> 대전·충청 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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