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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화양연화' 중 한 장면 |
온양(아산)에 가는 시외버스에 올랐다. 참으로 오랜만에 아내도 동행하여 곁에 앉았다. 냉방시설인 에어컨까지 빵빵하게 시원하고 좋아서 마치 소풍을 가는 느낌이었다.
‘요즘 세인들의 화두인 가정용 전기료의 누진세 파괴가 이뤄진다면 이처럼 서민들도 두루 시원할 텐데!’ 그런데 온몸이 ‘부실공장’인 아내로선 버스가 천안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다시금 아프다며 성화였다.
애초 혼자서 온양으로 출발했다면 아내의 찡그린 얼굴을 안 봐도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로선 유일한 혈육이자, 또한 집안의 가장 어르신인 숙부님을 뵈러 가는 길이었다. 더욱이 최근엔 뇌경색 질환으로 입원까지 하셨다가 퇴원하셨다고 했잖은가!
천만다행으로 초기에 수술을 잘 받으신 덕분에 8일 만에 병원을 나오셨대서 얼마나 반갑고 기뻤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지난 5월의 어버이 날 즈음 이후 석 달 만에 뵌 숙부님께선 부쩍 수척한 모습이어서 마음속으로 아픔의 비가 후줄근 내렸다.
“앞으론 금주 금연에 더하여 고기반찬 대신 신선한 야채만 드셔야 된 대요!” “알았어, 그나저나 네 안식구는 여전히 건강이 안 좋아서 걱정이구나….” 근무라서 같이 갈 순 없지만 할아버지께 뭐라고 사드리라고 돈을 보내온 아들이었다.
온양 도착 전에 그 돈을 미리 출금하여 봉투에 담았다가 숙부님께 드렸다. “이건 제 아들이 드리는 겁니다.” 숙부님의 칭찬이 이어졌다. “네 아들과 딸은 참 효자여~!” 맛난 점심까지 사드리려 하였으나 지인과 선약이 있대서 어쩔 수 없었다.
이윽고 그 지인이 오셔서 숙부님께서 먼저 출발하셨다. “추석에 또 뵙겠습니다. 건강하셔야 돼요!” “그래, 고맙다.” 돌아서 가시는 숙부님의 모습을 보자니 문득 화양연화(花樣年華)가 떠올랐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표현하는 말이 ‘화양연화’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늘씬한 키, 그리고 만년 신사였던 숙부님께선 자타공인의 멋쟁이셨다. 소싯적엔 그래서 숙부님께서 다방 등지에라도 들르실라 치면 심지어 “영화배우가 떴다!”라는 소문까지 회자되었다던가.
여기서 잠시 세월을 역류하여 딸이 서울대에 합격하던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당시 출신고교에선 유일무이 서울대 합격이라며 난리법석이었지만 가난뱅이였던 나는 마음이 촘촘한 거미줄에 걸린 벌레인 양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사랑스런 딸내미의 등록금마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제적 고립무원과 사고무친의 슬픔에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술만 마셨다. 그러나 더 이상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결국 찾아간 곳은 물보다 진한 피가 흐르는 숙부님 댁. 딸의 서울대 합격증을 보여드리며 손을 벌렸다. “야~! 내 손녀가 공부를 잘 해서 일을 낼 거라곤 예상했지만 솔직히 서울대까진 몰랐다. 하여간 정말 장하구나! 돈은 내일 입금해 줄 테니 은행 계좌번호 적어놓고 가.”
이튿날 숙부님으로부터 입금된 돈은 딸의 대학 등록금을 내고도 한참이나 남았다. 그동안 밀린 각종의 공과금 납부 외에도 당면한 우리 집의 생활비로 충당할 정도로까지의 거액이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선 나를 낳으셨지만 솔직히 부친(父親)으로서의 ‘자격’까진 갖추지 못 한 분이었다. 고난의 가시밭길 점철과 험산준령의 고초 감당 외에도 불학(不學)과 ‘소년가장’이란 부끄러운 완장의 착용 강제부여 등은 지금 생각해봐도 도저히 비가역적(非可逆的), 즉 주위 환경의 변화에 따라 이리저리 쉽게 변하지 않는 어떤 고착화의 슬픔이자 아픔이었다.
물론 그러한 상처가 있었기에 일종의 반면교사로써 두 아이를 사랑과 칭찬으로 잘 기르긴 했지만. 반면 숙부님은 진정 친부(親父) 이상으로 나를 여전히 아끼고 사랑해 주시는, 참으로 감사한 은인(恩人)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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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화양연화' 중 한 장면 |
그렇지만 숙부님께선 연전 숙모님의 타계 이후 부쩍 쇠약해지셨다. 따라서 숙부님을 뵐 적마다 마음이 엄동설한처럼 시리다. 아울러 마치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와도 같았던 숙부님의 젊었던 시절이 오버랩 되면서 ‘화양연화’까지 떠오른다.
왕이 신하에게 어질고 백성까지 두루 사랑하는 정치를 일컬어 ‘왕도정치’라고 하지만 신하에게 모질고 백성마저 힘으로 부리고자 하는 정치는 ‘패도정치’라 했다. 마치 오늘날 국민적 원성의 도가니로까지 점화된 가정용 전기료 누진제가 꼭 그 짝이란 느낌이다. 오늘이 말복(末伏)이라곤 하지만 더위는 여전하다.
하여간 이러한 ‘패도정치’와도 같이 생로병사(生老病死)야 어쩔 수 없는 신의 영역이라지만 우둔한 인간은 이마저 거부코자 하는 속성을 지니게 마련이다. 이런 맥락에서 숙부님께서 늘 무병장수하시길 소망한다. 아울러 좋고 기쁜 일만 곰비임비 늘어난다면 금상첨화겠다.
홍경석 / <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월간 오늘의 한국> 대전·충청 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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