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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로 압송되는 녹두장군 전봉준/사진=연합 DB |
동학혁명(東學革命)은 1894년에 발생했다. 전라도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민중혁명운동이다. 최제우(崔濟愚)가 1860년 동학을 창도하여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양반지배층의 반발로 체포되어 1864년 참형(斬刑)을 당하고 말았지만 그의 가르침은 계속 번져 그 후 30년 동안에 전국적인 확산을 가져오게 되었다. 당시 한국(조선) 사회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심한 부패현상이 만연했다.
이런 상황에서 1862년 진주민란을 필두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70여 건에 달하는 대소 민란이 발생하는 등 민중의 원성이 고조되었다. 1894년 2월 5일 전봉준을 선두로 농민군이 전라도 고부에서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학정에 못 이겨 관아를 습격한다.
그리곤 세미(稅米)를 빈민에게 나누어주고 만석보(萬石洑) 저수지를 파괴하고 해산한 것이 동학혁명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수만 명 농민군이 체제를 갖춰 전남북 일대를 차례로 점령하여 탐관오리를 추방하고 그해 5월 31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놀란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원군을 청했고, 6월 8일 청나라 군이 아산만에 상륙하자 일본 역시 천진조약에 의해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6월 7일 출병할 것을 결정했다. 결국 전봉준은 밀고자에 의해 그해 11월 순창에서 체포되어 그 이듬해 사형당하고 말았다.
동학혁명의 결과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까지 일으켰다. 또한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차례로 1905년 을사조약과 고종퇴위, 군대해산, 사법권 박탈 등 침략의 수순을 전개한다. 내처 1910년엔 한일합방을 이룸으로써 조선왕조는 끝을 맺고 우리나라는 실로 암울한 35년 일제 강점기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다소 장황하게 ‘동학혁명’을 새삼 돌이켜본 것은 북한의 독재체제에선 왜 그러한 혁명의 바람이 불지 않을까 라는 의아심 때문이었다. 최근 북한은 사상 최악의 수해를 입었다고 한다. 따라서 같은 민족의 정서에서 보자면 그들보다 수십 배 잘 사는 우리가 부자(富者)의 온정으로라도 인도적 지원만큼은 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하지만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 절을 하지만 미우면 반대로 처가식구가 다 밉다는 말이 있다. 그러하듯 은장구보(恩将仇报), 즉 ‘은혜를 원수로 갚는’ 북한의 김정은 정권을 보자면 그럴 마음이 채 봄도 안 되었는데 밖으로 나왔다가 놀라서 다시 겨울잠을 자려고 쏙 들어가는 개구리와 같다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 정부에서 이른바 ‘햇볕정책’을 펴면서 북한에 지원된 금액만 자그마치 8조 8000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정권은 이를 고마워하기는커녕 되레 핵까지 개발했다면서 연일 우리를 협박하고 있다.
때문에 슬그머니 드는 생각은, 아니 망상(妄想)은 북한주민들도 이제는 더 이상 참지 말고 ‘제2의 동학혁명’을 도모했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민(국민)은 안중에 없는 김정은을 내친 뒤 진지하고 심도 있는 남북대화의 장으로 나온다면 오죽이나 좋을까!
홍경석 / <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월간 오늘의 한국> 대전·충청 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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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