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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가 보수하기 전의 석굴암 본존불(연합뉴스 자료사진) |
얼마 전 모 교육기관에서 실시하는 ‘제1기 열린 기자단’ 모집공고를 보았다. 평소 교육에 관심이 많은 터인지라 주저 없이 응모했다. 응모를 하면서 ‘혹시 불합격이 되면 어쩌지?’라는 부정적인 생각은 티끌만큼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자기부정은 결과 역시 안 좋은 쪽으로 도출되는 때문이(었)다. 올해로 시민기자 경력만 14년차다. 그동안 경험한 시민(객원,리포터 등)기자의 장르와 반경은 그야말로 다방면과 아울러 각양각색의 현실을 두루 고찰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뿐만 아니라 관련기사를 쓰는데 있어서도 연구와 노력 등 심혈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자연스레 필력까지 향상되는 덤을 얻게 되었다. 아울러 박봉에 시달리던 처지에서 기사의 양에 따라 지급되는 원고료는 마치 빈집에 소가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되돌아보건대 나는 엄동설한의 삭풍이 부는 날에 태어난 고난의 베이비부머 세대다. 설상가상 소년가장이란 유배(流配)가 뒤를 이었다. 역전에서의 구두닦이를 시작으로 신산한 세상과 씨름을 해야만 했다.
이어 행상과 우산장사, 노동과 ‘공돌이’ 등 하층민이 겪는 각종의 고생과 생활고의 핍박으로 10대를 보냈다. 방위병으로 군 복무를 마치고선 취직을 했지만 불학의 무지렁이였던 까닭에 비정규직의 변방과 폭풍한설만을 떠돌아야 했다. 세월이 더 흘러 작수성례로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보았다.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었기에 아이들의 교육에 있어선 나름 최선을 경주했다. 착한 아이들답게 각자도생(各自圖生)으로 공부를 잘 해주었다. 아들에 이어 딸 또한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더욱이 딸은 S대에 들어갔는데 그것이 결국엔 작년에 첫 저서를 내는 동인(動因)이 되었다.
‘사교육 없이도 명문대 가는 노하우’로 글을 써보라는 주변의 권유가 발단이었다. 그렇게 해서 발간된 책이 <경비원 홍키호테>다. 책을 내고 나서 언론의 인터뷰가 줄을 이었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지금 연재하고 있는 이 칼럼의 집필 역시 책을 출간한 다음의 결과물이자 언론사의 참 고마운 배려 덕분이다.
독서에 심취한 것은 30년 전부터이며, 본격적인 글쓰기는 약 20년 전부터이다. 그렇게 열심히 글을 쓴 덕분에 각종의 문학공모전에선 100여 차례 이상 수상했다. 비록 여전히 부족하되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기적을 믿으며 지금도 다방면의 매체에 꾸준히 글을 올리고 있다.
평소 글쓰기라는 건 운동과도 같아서 하루만 게으름을 피워도 금세 표가 난다. 안중근 의사께서는 “하루만 책을 읽지 않아도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고 하셨지만 나는 하루만 글을 쓰지 않아도 손이 무디어지는 느낌이다.
각설하고 그제 합격자 발표 문자를 받고 모 교육기관에서 실시한 ‘제1기 열린 기자단 발대식’에 참석했다. 교육에 이어 기념사진까지 찍었는데 가만 보니 내가 최고령자였다. 아~ 세월이 이렇게나 빠르구나….
시민기자로 처음 참여했을 적엔 40대 초반이었기에 최소한 중간은 갔었거늘 이젠 아니다. 어쨌거나 ‘열린 기자단’의 설립 취지는 적극적 홍보와 그에 걸맞는 혜안의 집필일 터다. 현재 내가 알고 지내는 지인들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사귄 분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양분된다. 한데 그 숫자가 50대 50일 정도로까지 많다.
그래서 말인데 주변에 즐비한 좋은 사람들은 진정 알짜의 내 재산이다. ‘홍-키호테의 도전정신으로 /경-쟁하리라 /석-굴암보다 굳은 의지로’. 새로이 시작한 열린 기자단에 임하는 나의 자세를 내 이름으로 된 3행시에 담아보았다.
사족이겠지만 경북 경주의 큰 지진에도 불구하고 석굴암 내부는 큰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세월아 비켜라~ 여기 노장(老將)이 간다!”
홍경석 / <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월간 오늘의 한국> 대전·충청 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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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