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용궁에서 짜장면을 먹다

  • 오피니언
  • 우난순의 식탐

[우난순의 식탐]용궁에서 짜장면을 먹다

  • 승인 2017-11-10 01:23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KakaoTalk_20171109_131719737
춘향? 춘양? 춘양(春陽)이었다. 춘양의 어원은 어디서 왔을까. 어둑어둑한 가을의 춘양에서는 봄볕(春陽)은 온데간데 없고 골 깊은 찬 기온이 옷섶을 파고들었다. 하긴 봉화 어디엔가 이몽룡의 생가가 있다고 하니 춘양이란 지명이 뜬금없어 보이진 않는다. 10월의 마지막 밤을 며칠 앞두고 춘양에서 짜장면을 먹었다. 욱신거리는 발을 이끌고 춘양역에서 내리는 나를, 그날 우연히 만나 등산을 같이 한 늙수그레한 남자들은 뜨악해서 멀건히 바라보기만 했다. "춘양이 뭐 볼 게 있다고 내린대요? 곧 캄캄해질 텐데….", "참말로 알다가도 모르겠네. 영주에 가서 밥이나 먹읍시다."

5일간의 꿀 같은 정기휴가를 내고 오색 단풍에 취해 산을 오르고 올랐다. 선크림은 물론 로션 하나 바르지 않고 맨 얼굴로 원시인마냥 걷고 또 걸었다. 저녁이 되면 온 몸은 천근만근 물 먹은 솜뭉치가 되어 쓰러져 자곤 하지만 아침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말짱했다. 그게 여행이다. 인간은 놀이하는 동물이라고 어느 인문학자는 통찰력있는 이론을 내놓았다. 놀고 먹고 자고, 이 단순한 명제가 나의 정체성을 확연하게 증명하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김밥 사들고 산속에 들어갔다가 오후 늦게 내려오는지라 기름진 음식이 마구 당겼다. 여행 중에는 하루 한 끼만 배부르게 먹는 게 철칙인데 워낙 빡세게 움직이다 보니 에너지가 고갈될 지경이었다.

뭐에 홀린 듯이 서둘러 내린 춘양은 고소한 들깨 냄새가 진동했다. 들판 여기저기 베어진 들깻단이 무더기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한층 누그러진 햇살이 따사로워 길가에 주저앉아 담배라도 피워 물고 싶은 허기가 몰려왔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즉에 담배를 배워두는 건데. 멀리 산 아래 집 굴뚝에서 뽀얀 연기가 피어 오른다. 식욕이 동했다. 춘양은 시골 면소재지 치고는 집들이 널찍하고 우아했다. 어느 집 정원의 늙은 느티나무, 모과나무가 그 집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한때 번성했던 한 가문의 영락이 고스란히 느껴져 발걸음을 멈추고 담장 틈새로 안을 기웃거렸다. 잡풀이 무성한 걸 보니 나이 지긋한 어른들만 사는 모양이다. '춘양'이라는 고혹적인 이름이 새삼스럽지 않다.

뒤를 돌아보니 기차에서 같이 내린 할머니가 가방을 들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짐을 들어드린다 해도 꿋꿋이 사양하며 여긴 무슨 일로 왔냐고 물었다. 기차타고 지나다가 춘양이란 이름이 이뻐 내렸다고 하니까 별 싱거운 사람 다 보겠다는 듯이 웃었다. 무릎이 아파 삼척 가서 한약을 지어온다고 했다. 거기에 용하다는 한의원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아침 일찍 갔다가 이제 오는 길이란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다. 배가 고파 우선 뭘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이 길 따라 조금만 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으면 용궁반점이라는 중국집이 나와. 외지인들이 종종 오더라고. 여기 사람들도 많이 먹어."

심청이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을 시주하고 인당수에 몸을 던져 간 곳이 용궁 아니던가. 춘향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춘양에 용궁도 있고, 하여간 춘양은 까도까도 자꾸 나오는 양파 같은 곳일까. 밥 때가 아니어서인지 용궁은 적요했다. 세 여인이 나를 반겼다. 할머니 한 분과 중년의 여자 둘. 짜장면을 시키고 식당을 둘러보다 깜짝 놀랐다. 어라? 재담꾼 성석제도 다녀갔네. 그가 먹고 중앙 일간지에 쓴 에세이가 인쇄되어 벽에 붙어 있었다. 계란 프라이를 처억 얹은 간짜장이 나왔다. 아, 이 냄새! 입 안에 침이 고인다. 아이 어른 할 거 없이 누구나 다 좋아하는 짜장면. 소스를 듬뿍 넣고 썩썩 섞어 볼이 미어터져라 입에 욱여 넣었다. 내 옆에서 할머니도, 짜장면을 만들었던 할머니의 딸도 짜장면을 먹었다. 또다른 여인은 할머니 딸의 시누이다. 그들과 내가 한 가족처럼 짜장면을 먹었다.

"분천에 산타마을이 생겨서 사람들이 이젠 여긴 안 와. 춘양이 예전엔 장도 크게 서고, 춘양목 들어봤지? 여기 소나무가 유명했거든. 큰 목재소도 있었고…." 쇠락해 가는 마을과 사람들은 왜 매혹을 발하는가. 내가 짜장면을 다 먹은 걸 보고 그 딸이 "밥 있는데 줄까?"하길래 사양했다. 짜장면은 온전히 짜장면으로 끝나야 한다. 딸의 시누이가 진한 믹스커피 한 잔을 타 줬다. 커피를 홀짝이며 봉화 사과가 엄청 맛있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니까 딸이 옆집에서 줬다며 사과 세 알을 봉지에 담아 줬다. 시커먼 하늘에 뜬 고양이 눈 같은 손톱달을 의지하며 버스를 타고 봉화 읍내로 갔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다음엔 나른한 봄볕이 쏟아지는 춘양에서 세 여인과 짜장면을 먹어야겠다. 우난순 기자 rain4181@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세종시, '영화·드라마' 촬영 명소로 간다
  2. 두 자녀 태우고 만취운전 30대 사고까지…여름철 엄격 단속 필요
  3. [대전 전통산업 특화거리의 새로운 미래를 그리다] ①대전 전통산업과 특화거리의 탄생과 번영…그리고 존폐의 기로
  4. K리그 휴식기, 대전 서포터즈는 '청소' 중?… "승리의 기운을 줍습니다"
  5. 창업기업 74곳에 최대 4억원 '대전 창업기업 들썩'
  1. 폐현수막의 변신은 ‘무죄’
  2. 우송대 응급구조학과 학생들, ‘실무능력 UP’
  3. 천문연구원, 희귀 왜소신성 발견…공전주기 짧아 중요 연구대상
  4. 충청권 7월 본격 장마 예상…올해 평년보다 강수량 많아 '주의'
  5. 대전 보건소 인력부족에 '허덕'…전국 광역시 중 가장 적어 보건의료 '빨간불'

헤드라인 뉴스


대형 참사 잇따른 대전서 `119 정밀위치추적` 전국최초 실증 나선다

대형 참사 잇따른 대전서 '119 정밀위치추적' 전국최초 실증 나선다

대전에서 대형 참사가 잇따르며 구조 골든타임의 중요성이 커진 가운데, 구조대상자가 있는 층수와 함께 15m 오차로 위치를 파악하는 기술이 대전 소방 현장에서 전국 최초로 시작된다. 대전 안전공업 화재 당시 국가소방동원령 발령 이후에도 일부 요구조자가 유가족과 통화를 이어간 사실이 알려지면서, 재난 현장에서 요구조자의 위치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기술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이번 정밀위치측정 기술의 구조 현장 적용 여부에 관심이 더 쏠리는 이유다. 23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소방청, 대전소방본부 등에 따르면 긴급구조..

"대전 도시철도 2호선 트램 개통 2030년 하반기로 늦어진다"
"대전 도시철도 2호선 트램 개통 2030년 하반기로 늦어진다"

대전도시철도 2호선 트램 개통이 2030년 하반기로 지연된다고 대전시가 공식 인정했다. 당초 2028년 개통보다 2년여가 더 늦어지는 것으로, 주요 공정 리스크와 차량 시운전 계획 반영 등을 이유로 꼽았다. 유득원 대전시 행정부시장은 23일 대전시청 기자회견장에서 도시철도 2호선 트램 관련 브리핑을 갖고 "향후 통합공정 계획 수립을 통해 개통 일정 등을 최종 확정할 것"이라면서 개통 지연을 공식화 했다. 도시철도 2호선 트램은 총연장 38.8㎞, 정거장 45곳, 차량기지 1곳 규모로, 2024년 12월 착공해 현재 본선 14개 전..

[대전 전통산업 특화거리의 새로운 미래를 그리다] ② ‘생산성을 넘어 브랜딩을 창출하라’
[대전 전통산업 특화거리의 새로운 미래를 그리다] ② ‘생산성을 넘어 브랜딩을 창출하라’

대전 중구 중촌동 맞춤패션거리와 정동 인쇄거리, 원동 한복거리 등 과거 대전을 상징하던 유서 깊은 산업 자산들이 중대한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다. 자구책 마련을 위해 붙여진 특화거리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급격한 산업 구조 변화와 유통 시스템 현대화 속에서 경쟁력을 잃어간 채 존폐의 기로에 서면서다. '생산의 효율화'란 거대한 산업 발전 흐름이 오늘날 현대 사회의 모든 가치를 장악하고 있지만, 지역의 고유한 숨결과 정체성이 담긴 전통산업의 흔적이 미래세대에 적절히 계승돼야 마땅하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낡은 산업의 미래를 새..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문창동 화재피해 복구 돕는 손길 문창동 화재피해 복구 돕는 손길

  • ‘대한민국을 응원합니다’…월드컵 응원 고조 ‘대한민국을 응원합니다’…월드컵 응원 고조

  • 폐현수막의 변신은 ‘무죄’ 폐현수막의 변신은 ‘무죄’

  • 우송대 응급구조학과 학생들, ‘실무능력 UP’ 우송대 응급구조학과 학생들, ‘실무능력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