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전용란(건신대학원대학교 총장) |
러시아의 상뻬테르부르그에 있는 에르미타제 박물관에 가면 한 벽면을 가득채운 큰 그림이 있다. 예수님의 탕자의 이야기를 그린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이라는 그림이다. 어둡게 처리된 화면에는 아버지가 구부정하게 아들을 안고 있는데 아들은 무릎을 꿇고 한쪽 신발은 벗겨진 채로 아버지 품속으로 파고들 듯 안겨있다. 인생을 허비하고 탕진한 채 실패한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과 그 아들을 오랜 시간 인내하며 기다렸던 아버지의 그리움 가득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속 썩이는 아들과 속 타는 아버지의 인내와 사랑. 이 사랑이 안전지대를 만들어준다. 돌아갈 수 있는 안전지대. 우리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크다. 실패는 곧 이탈이며 내몰림이고 함께 할 수 없음이다.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 경직된 사회에서는 탕자가 돌아갈 곳이 없다. 실패를 딛고 나아갈 수 있는 용기는 그 실패를 있는 그대로 품어주고 다독거리며 용서해주는 아버지와 같은 품속에서 만들어진다.
우리 사회는 그러한 '아버지'의 부재를 겪고 있다. 가정에서 아버지는 관계가 없어진 채 권위만 남아있다.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아버지, 간섭하며 몰아붙이는 아버지, 자신이 성취하지 못한 것들을 요구하며 온갖 기대를 쏟아내는 아버지. 이 아버지에게 실패한 자식은 수치이다. 이 자녀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은 없다. 그 아버지의 뜻을 따르느라 자신에게는 가혹하고 주눅든 채 억눌린 삶으로 자신도 남도 믿지 못하는 불행한 자식들이 넘쳐 나게 된다. 불행한 자식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쉴 곳도 없고 마음껏 울 곳도 없어 끝 모를 바닥으로 허물어져 간다. 그들에게 돌아가 지친 영혼을 뉘일 곳, 한 곳도 없다는 것은 참으로 가혹하다. 기다리고 용서해주는 아버지의 품은 얼마든지 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회복의 은총을 누리도록 해준다. 용서하고 용납하는 어른들의 품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부자의 장면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키큰 한 남자가 오른편에 그려져 있다. 이 집의 큰 아들이다. 탕자를 대하는 아버지의 눈길과 큰 아들의 눈길은 동과 서만큼이나 정반대의 대척점에 놓여 있다. 아버지 곁을 성실하게 지키며 집을 떠나 본적 없는 큰 아들은 방탕하다 돌아온 동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가득하다. 그의 마음은 이해와 용서는커녕 더 굳어져만 간다. 공정함의 기준으로 볼 때 큰 아들의 분노는 너무도 당연하다. 장자의 생각은 상식이다. 그의 생각은 옳다. 재산 탕진하고 아버지 속을 썩이며 하고 싶은 데로 실컷 즐기다 돌아온 놈을 동일하게 대우할 수는 없다. 그가 쾌락의 시간을 보낼 때 맏아들은 아버지 옆에서 죽도록 일만하며 성실하게 살아왔다. 그에 대한 보상은 무엇인가? 점점 감사의 마음이 없어진다. 내가 최선을 다해 일 했기 때문에 인정받을 만하며 그것은 자신의 일에 대한 결과이니 당연하고 공정한 것이다. 과연 그럴까? 맏아들이 생각한 것처럼 자신의 힘으로만 살아진 것일까? 자기공로에만 집중하면 감사하는 마음을 상실한다. 타인에 대한 깊은 공감과 배려의 여유를 갖지 못한다. 경쟁사회 속에서 뒤쳐진 인간들은 그들의 열등함과 게으름과 그들의 잘못된 선택의 문제일 뿐 내가 보듬어 주어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성실하게만 최선을 다해 살아온 형의 싸늘한 시선을 보면 소위 모범적 삶만 답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오히려 위협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공정한 사회를 부르짖는다. 얼마나 오랜 세월 공정하지 못한 세상을 살아왔는지 온 존재를 던져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을 곳곳에서 발견한다.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귀퉁이에서 올라오는 두려움이 있다. 그 공정함은 어떤 공정함일까? 탕자의 귀환에서 묘사되고 있는 맏아들이 느끼는 수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공정함은 아닐까? 공정함으로 기준을 세운 사회는 지적과 비난과 고소와 고발이 오고 갈 수밖에 없다. 이 수준을 뛰어넘어야만 모두가 함께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더 높은 차원의 공정함이 필요한 이유이다. 실패한 인생과 같은 탕자는 돌아와야 하고 돌아온 탕자를 끌어안는 수용의 사회가 돼야 한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는 있는 그대로를 안아 줄 수 있는 사회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는 용서할 수 있는 사회다. 비난보다 이해가 먼저, 질시보다는 사랑이 먼저인 제스추어를 보여줄 수 있는 안전한 사회가 필요하다. 우리는 얼마나 용서하며 살았을까?
전용란 건신대학원대학교 총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전용란 건신대학원대학교 총장

![[대전, 일류 문화도시의 현주소] 제2문화예술복합단지대·국현 대전관… 대형 문화시설 `엇갈린 진척도`](https://dn.joongdo.co.kr/mnt/webdata/content/2025y/12m/15d/118_202512150100130240005453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