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톡] 선생님을 가르치는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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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톡] 선생님을 가르치는 제자

남상선 /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 승인 2020-07-03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가을 낙엽 같은 단상 하나를 정리해놓고 취침에 들려는데 대천서 전화가 왔다. 시계를 보니 밤 11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마침 TV에서, 주말까지 계속되는 강추위로 수도나 보일러 동파가 염려되니 각별한 주의 관리가 필요하다는 한파 경보가 보도된 지 채 30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아마도 한파 경보에 내 생각이 났던지 전화를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난방비 절약한다고 보일러도 틀지 않고 지내서는 안 된다는 주의를 환기시키는 전화였다. 게다가 연금 타는 거 저축하느라 춥게 지내서도 안 된다는 경고까지 덤으로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제자 얘기가 나왔으니 제자에 관련된 이야기를 좀 더 해야겠다.

2년 전 제자가 예고 없이 방문을 했다. 때는 마침 겨울이었는데 난방비 많이 나온다고 보일러를 틀지 않고 전기장판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였다. 그 때 제자가 거실에 들어와 차 한 잔 같이 하고 갔는데 아마도 실내 공기가 꽤나 냉랭했었던 것 같았다. 나는 습관 탓인지 별로 추운 것 같지 않았었는데 제자는 많이 추워서 떨고 간 것임에 틀림없었다.

가던 날이 장날이란 속담처럼 하필이면 제자가 왔던 그 날 보일러를 틀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설령 그날 와서 보고 간 것이 사실이 아니라도, 그 자체가 진실이 돼 버린 것이었다. 겨울인데도 춥게 지낸다는 인식을 하고 간 것임이 분명했다.

세속적인 말로 돈 몇 푼 아낀다고 궁상떠는 사람으로 낙인찍힌 듯한 느낌이었다.

직접 눈으로 보고 간 내 생활의 일부가 걱정되어서였던지 어느 날 부터인가 심심찮게 걸려오는 전화가, " 선생님 따듯하게 보일러도 틀고 춥지 않게 지내세요"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 제자가 내 마음 속에 살고 있는, 자랑스러운 충고 80년대 정지식 제자이다.

고등학교 졸업한 지 35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선생님을 끔찍하게 챙기는 제자, 아니, 많은 깨우침과 고마움을 느끼게 하는 제자라 할 수 있겠다.

고3 때 내가 담임했던 그 시절엔, 공부로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 했지만 의리가 있고 따듯한 가슴을 가진 학생으로 내 머릿속엔 각인이 돼 있었다.

따뜻한 봄 어느 날 내 반 학생 둘이 싸웠는데 그 싸움에 연루되어 주의를 받은 학생이 바로 이 제자였다. 세 학생을 훈계하기 전에 싸운 동기가 무엇인지 채근해 보았다. 싸움의 발단은 아침 굶고 온 K○○가, 힘이 약한 B○○의 도시락을 몰래 먹은 것이 화근이었다. 힘이 약한 B○○는 도시락을 빼앗기고도 힘이 센 K○○한테 얻어맞는 걸 목격하고 있던 바로 이 제자가, 힘이 센 K○○을 비겁한 놈이라고 응징한 사건이었다. 말하자면 약자를 돕고, 경위도 모르는 힘센 자를 타도한 셈이었다. 자초지종 듣고 보니 이 제자는 꾸지람이나 질책의 대상이 아니라 칭찬받아 마땅한 학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싸움으로 꾸중을 듣고 혼나는 처지였는데 차별을 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똑같은 훈시로 혼을 냈다. 혼을 내면서도 마음속에는 '응, 정지식! 너처럼 살아야 돼'라고 하며 응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 사람에 대한 질책 훈시를 마친 뒤에 조용히 불러 "싸움을 했지만 참 잘했다"는 얘기와 "너처럼 의롭게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며 칭찬해 주었다.

제자 얘기를 하다 보니 어쭙잖게도 공자님의 '삼인지행 필유아사(三人之行 必有我師)(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가운데엔 반드시 나한테 깨우침을 주는 스승이 있다)'란 말이 떠올랐다.

제자가 깨우침을 줬으니 바로 이 제자가 공자 말씀에 걸맞은 인물이 아니겠는가!

또 한 번은 유성고에서 내가 퇴직하던 때 있었던 일이다.

퇴임하던 그 해 2월에 반창회( 80년대 충고 3학년 1반)에 모시려고 왔다며 날 승용차에 태우고 제자가 하는 말이,"제가 사는 대천에다 선생님 전원주택 한 채 지어드릴 테니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라고 했다. 뜬금없이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진실이었다. 그 당시 제자는 건축회사(시은 건설) 대표이사로 있었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으로는 하기 어려운 말이라 선뜻 말이 나오질 않았다.

침묵으로 일관할 수 없어 잠시 여유를 두고 있다가 "감사하다"는 말로 답을 했다. "졸업한 지 근 30년이 되는 세월인데도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이 너무 고맙다"고 했다. 그 다음 말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순간적 고민을 하다가 "고마운 뜻을 마음으로만 받을 테니 없던 얘기로 하자"고 했다.

얘기를 다 듣고 있던 제자가 하는 말이, "제가 선생님을 존경하고 좋아해서 대천에 모시고 같이 살고 싶은 생각에서 드린 말씀이지만 꼭 그것만은 아닙니다. 사적으로는 제가 형이 없는 사람이라 선생님을 형님으로 모시고 싶기도 하고, 사모님 돌아가시고 외롭게 지내시는 선생님 걱정이 돼서 드린 말씀이니 사양하지 마시고 받아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하도 진솔하게, 간절하게, 하는 말이라서 가슴이 뭉클했다.

하던 얘기는 반창회 얼굴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다 왔기에 멈추고 말았다.

반창회 끝나고 집에 와서 고민 아닌 고민을 하다 인근 교직선배 형님들께 자문을 구했다. 헌데 의견은 반반이었다. "제자 뜻을 받아들여 대천으로 가는 것도 좋겠다"는 선배도 계셨고, "제자가 존경하는 마음으로 모셔가지만 오랜 세월 곁에서 같이 살다보면 남선생에 대한 모든 것을 속속들이 다 알게 되어 그 뒤부터는 존경심이 사라지게 되니 가지 않고 평생 존경받고 사는 게 좋겠다"는 얘기도 하셨다.

그 뒤에도 몇 차례 전화가 왔다. 대천에다 제자가 사는 집을 다시 지었는데 집 구경을 하러 오라는 거였다. 새 집 입주 축하차 바람도 쐴 겸 해서 대천엘 갔다. 너무나 잘 지은 새 집에 살고 있었다.

"오신 김에 선생님 사실 집 지을 택지가 괜찮은 거 나왔으니 보러가자"고 했다. 현지답사를 하면서 나는 고민 끝에 결심한 그대로를 제자에게 말했다.

"자네의 감사한 마음을 내 이미 다 받았네. 허나 나는 대전을 떠날 수 없네. 그 이유는 이러하네. 내가 39년 교직 생활 중에 30년이 넘는 세월을 대전서 살았고 지인들, 친구들이 대전에 다 있어 나는 대전을 떠날 수 없네. 거기다 내가 혼자 사는 몸이니, 내가 대천에 간다면 자네 부인이 평생 나 챙기는 거, 신경 쓰는 거, 눈에 보이듯 자명한 사실인데 나 그런 부담 평생 자네 부인한테 주면서 살 자신 없네. 호의 받아들이지 못해 미안하네. 자네 마음은 다 받은 것으로 하겠네. 고맙네."

이렇게 해서 고민하던 것은 매듭을 지었다.

그런데 이후 상황이 내 미안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겨울 되면 김장해서 보내지. 1년 두 번 명절에, 내 생일까지 빼놓지 않고 챙기는데다 바리바리 싸인 반찬까지 보내어 날 울컥하게 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매년 가을되면 농사지은 햅쌀까지 보내니 세상에 이런 제자가 어디 또 있단 말인가!

이런 따듯한 마음을 나한테만 주는 제자 부부가 아니라, 음지에서 허덕이는 사람에까지 베푸는 마음으로 살고 있으니, 하고 있는 사업이 어찌 잘 안 될 수 있으랴!

거기다 마음 편히 사업에만 종사할 수 있게 해 주는, 천하에 둘도 없는 현모양처의 내조까지 있으니 이 어찌 승승장구하는 사업이 아닐 수 있으랴!

빚지고서는 못 사는 성격이라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제자의 사랑에 대한 보답은 되지 못하지만 조금은 덜 미안하려고 꿈틀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자의 큰딸이 쌘뽈여고 2학년이었을 때 1년간 한 달에 하루씩 대천 가서 국어 심화학습을 했다. 국어교사로 퇴임한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자 두 딸을 앉혀 놓고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아버지와 어머니는 너의 부모님이라고 세뇌가 되다시피 주입시켰다. 그 결과 1년 후에는 제자 큰딸이 원광대학교 역사교육과 진학을 하게 되었다.

그 정도만으로는 미흡하다는 생각에, 제자 내외분 생일날엔 축하화분을 보내어 내 마음을 전했다. 제자의 생일엔 회사 직원들에게 재자 낯을 세워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화분을 회사로 보냈다. 또 매일 새벽 기도엔 제자 가족 모두의 건강, 사업 번창, 자녀들의 성공을 비는 기도를 빼놓지 않고 해왔다.

생각에 잠기노라면 사람답게, 가슴 따듯하게, 사람냄새 풍기며 살려하는 제자가 존경스럽다. 현세에서는 보기 드문 천연기념물로 생각이 될 정도라 하겠다.

현재는 제자가 부국건설 대표이사로 지역사회에서도 칭송받는 인물로 승승장구의 가도를 달리고 있다. 제자는 사업을 하면서도, 베푸는 보람으로,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 따듯한 손길을 주는 보람으로 살고 있다.

바로 이런 제자가 내 살아오는 동안 체득 못한 깨달음을, 실천하지 못한 것을 실천궁행으로 보여주고 있으니, 가르침을 받던 제자의 DNA가, 깨달음을 주는 스승의 DNA로 승화된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님을 가르치는 제자'

나는 교과서적 이론지식을 가르쳤지만

제자는 교과서에도 없는, 따듯한 가슴에서 나오는

음수사원(飮水思源)하는 삶으로 날 깨우치고 있었다.

과거에는 내가 가르쳤지만

성인돼서는 제자가 날 깨우치고 있으니

이 어찌 청출어람(靑出於藍)이 아니겠는가!

남상선 /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남상선210-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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