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군자와 같은 차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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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난순의 식탐] 군자와 같은 차 한 잔

  • 승인 2021-05-06 09:34
  • 신문게재 2021-05-06 18면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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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 제공
하늘을 찌를 듯이 곧게 뻗은 삼나무가 늘어선 길을 천천히 걸었다. 싱그러운 바람이 코끝을 간질였다. 간밤 귀신 우는 소리를 내며 세상을 집어삼킬 것 같았던 폭풍은 온데간데 없었다. 딴 세상이었다. 천상에 발을 디딘 걸까. 밤새 거친 바람소리에 뒤척여 찌뿌둥한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졌다. 삼나무 기둥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비쳤다. 감개무량했다. 20년 전 이맘 때 왔던 길을 걷고 있다니. 지나온 세월이 찰나처럼 느껴졌다. 한낮의 백일몽에서 깨어난 것처럼 혼미했다. 꿈에 나비가 되어 물아일체의 호접지몽에 빠진 장자의 꿈이었나. 그날, 이곳 보성차밭에서 하루 잠깐의 인연을 맺었던 소녀가 생각났다. 실연의 아픔으로 핏기 없는 얼굴로 살포시 미소 짓던 그녀와 차밭 사잇길을 걸으며 많은 얘기를 나눴다. 새벽에 어설프게 만든 샌드위치를 나눠주자 맛있다며 달게 먹던 그 아이. 지금은 씩씩하게 잘 살고 있을까?

삼나무길이 끝나자 산 비탈에 드넓게 펼쳐진 차밭이 나타났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파릇파릇 돋아난 참새 혀 같은 찻잎이 싱싱했다. 한없이 투명한 공기와 파란 하늘 아래 차의 생명력이 전해졌다. 여린 싹을 하나하나 따야 하는 수고로움을 헤아려 봤지만 짐작하기 어려웠다. 사물을 대할 때 인간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어떻게 나무에 돋은 싹을 차로 우려 마시게 됐을까. 차는 인간의 역사와 같이 한다. 중국은 차의 원조 격인 셈이다.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진 차는 고도의 차 문화로 발전했다. '동다송'을 지은 초의 선사는 조선시대 차의 신성이었다. 초의와 정약용, 김정희는 차로 맺어진 관계다. 이들은 좋은 차를 나누며 학문에 대한 열정과 우정을 다졌다. 절해고도 유배지 제주에서 추사는 초의에게 차를 보내달라고 떼쓰는 편지를 쓰곤 했다. 정약용의 차 사랑도 추사 못지 않았다. 그는 호를 '다산(茶山)'으로 할 만큼 유배지 강진에서 차밭을 일구며 차를 즐겼다.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도탄에 빠뜨렸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차와 관련한 일화가 있다. 칼 하나로 천하를 평정한 히데요시는 왕가의 혈통이 아닌 보잘 것 없는 평민 출신이었다. 미천한 하급 무사의 자식이었던 히데요시는 외모도 볼품없었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그로선 자신의 내적 빈곤을 감추기 위한 근사한 무엇이 필요했다. 다도였다. 그에겐 리큐라는 다도 선생이 있었다. 리큐의 심미안은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 태생이 문화와 거리가 멀었던 히데요시는 이런 리큐를 시기했다. 거기다 천박한 자신을 비웃는 듯한 리큐의 오만한 태도도 참을 수 없었다. 황금으로 치장한 다실을 소유했으나 세상 사람들은 그를 업신여겼다. 세상 전부를 가진 그였지만 내면의 결핍은 어쩌지 못했다. 히데요시는 결국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어 리큐에게 할복을 명했다.

청신한 바람이 온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귀밑머리가 바람에 날리 듯 차밭을 에워싼 나무들도 살랑거린다. 나와 자연이 하나가 된다. 희열감이 마음 깊은 곳에서 파동을 일으킨다. 차를 가꾸고 마시는 행위는 정신을 수양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했다. 찻잎을 따다가 아홉 번 덖고 말리는 것이야말로 수행의 과정 아니겠는가. 뜨거운 불 앞에서 정성을 다해 참다운 차의 향기와 맛을 빚어내는 열락의 극치. 고백하자면 나는 차의 맛과 향에 대해 무지렁이다. 고매한 차의 향기로움을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언저리에서 그리워할 뿐, 탐욕과 미망에 갇혀 헤매는 악취나는 시정잡배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차밭에서 내려와 나무 그늘 아래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셨다. 입안을 가만히 헹구면서 잠시 머금었다 천천히 넘겼다. 떫고 씁쓰레한 맛이 오묘했다. 마지막으로 달큰함이 감돌았다. 군자와 같은 차 한 잔이 삿된 성정을 다스려준다. <제 2사회부장 겸 교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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