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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순 변호사 |
▲추사 김정희에 대한 지적 호기심 발현
지나간 삶의 흔적들에 대한 의미 있는 반추를 위해, 다가올 미래에 대한 삶의 충만함을 위해 오래전부터 선현들에 대한 평전을 열심히 구독하였다.
금년 초 추사 김정희 평전인 유홍준 저 <山산崇숭海해深심>(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을 읽으면서 좀 더 깊고 넓게 추사의 삶에 대해 알고 싶은 지적 호기심이 내심으로 강하게 일어났다.
추사는 신라의 김생, 고려의 탄연, 조선의 안평대군과 함께 우리나라 4대 명필 중 한 분으로 알려져 있어 더욱 더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추사는 나이와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거기에 맞게 200여 개의 호를 지었다. 평전에서는 호의 연유에 대해 설명을 하였음에도 호 '추사'의 연유에 대하여는 설명을 해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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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
의산, 한갈 선생님을 통해 청나라 대표 문인인 옹방강의 친구 겸 제자인 문인 강덕량의 호가 추사였고, 김정희는 옹방강과 강덕량의 학문과 인품을 존경하여 강덕량의 호인 '추사' 를 자신의 호로 삼아 학문 연구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미 있는 만남을 위해 의산, 한갈 선생님을 '막걸리 파티'에 초대하였고, 충남대 사회학과 교수로 대전세종연구원장을 역임하신 후 서예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는 박재묵 원장님을 초대하여 추사에 대해 여러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가졌다. '막걸리파티' 는 지인이나 전문가들을 모시고 법원 앞 음식점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환담하는 시간을 말한다.
초대 모임에 발맞추어 유홍준 추사 평전을 다시 읽고 유튜브를 통해 유홍준, 김용옥, 박철상 등 유명 강사들 강의를 들으면서 추사의 일생을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초대 모임 이후에는 '조선시대 금석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추사에 대한 독보적인 연구가인 박철상 저 <세한도>를 탐독하였다.
그 과정에서 '추사 김정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추사의 인간적인 면과 학문적 업적은 너무나 소중하여 나 혼자 삶의 자양분으로 삼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추사의 인생을 거울삼아 보다 나은 삶을 이루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추사 김정희의 삶
조선 후기 명문가 경주 김씨 후손으로 태어난 추사 김정희는 1786년 6월 3일(정조 10년) 이조판서를 지낸 경주 김씨 김노경과 김제 군수를 지낸 기계 유씨 유준주의 딸 사이에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추사의 고조할아버지 김흥경은 영의정을 지냈다. 증조할아버지 김한신은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 작위를 받은 부마로서 충남 예산면 용궁리를 사패지로 받았다. 영조의 계비로서 순조 초 수렴청정을 한 정순왕후는 12촌 대고모였을 정도로 추사의 경주 김씨는 영정조 시대에 명문 세도가 집안이었다.
김한신은 39세에 사망하였고, 화순옹주도 14일간 단식하여 뒤따라 사망함으로써 후사가 없게 되자 조카인 김이주를 양자로 삼았다. 김이주의 큰아들 김노영이 후사가 없자 김이주의 넷째 아들 김노경의 3남 중 장남인 추사가 8세에 김노영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김노영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부 남연군의 이모부이므로 이하응은 김정희의 이질 조카로서 김정희로부터 서예와 난치기를 배운 걸출한 제자이기도 하였다.
이성낙 가천대 명예총장은 1979년에 추사의 초상화를 자세히 관찰한 결과 얼굴에 희미하게 마마 흔적이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당시 천연두가 치명적인 돌림병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추사가 어릴 적에 가볍게 천연두를 앓고 무사히 지나가게 된 점은 후손들에게 크나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추사는 천연두로 눈썹에 마마 자국이 있어 눈썹이 3개로 나누어져 호를 ‘三眉’라고 하였다고 한다.
추사 역시 본처 소생이 없었고, 서자 김상우가 있었으나 서자를 후계로 삼을 수 없는 당시 종법에 따라 김상무를 양자로 들이게 되었다.
추사는 12세에 양아버지 김노영이 사망하고, 뒤이어 할아버지 김이주마저 타계함으로써 명실공히 월성위 집안의 주손이 되어 큰 가문을 맡게 되었다.
추사는 16세에 친어머니 유씨(36세)가, 20세에 부인 한산이씨, 스승인 초정 박제가가, 21세에 양어머니인 남양홍씨가 사망하는 등 개인적인 불운을 겪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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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가 7살 때 '入春大吉' 글씨를 대문에 붙여놓은 입춘첩을 보고 초정 박제가가 추사의 부친 김노경에게 '이 아이는 앞으로 학문과 예술로 세상에 이름을 날릴만하니 제가 가르쳐서 성취시키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영의정 번암 채제공은 위 ‘入春大吉' 입춘첩을 보고 부친 김노경에게 극찬을 하면서 '이 아이는 필시 명필로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오.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하면 크게 귀하게 되리라'라고 예언을 하였다고 한다.
청나라 문인 옹방강, 완원 등이 추사와 1회 대면, 수 십회 비대면으로 교류하면서 추사의 천재성에 대해 극찬한 것으로 보아 추사의 천재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추사 김정희가 초정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 행운
병자호란으로 인한 북벌론과 성리학이 영정조 시대에 들어와 그 세를 잃게 되면서 선진문물인 청나라의 사상과 문예, 과학기술 등이 조선으로 전수되었다.
조선의 수많은 영재들이 중국 선진문물을 전수받기 위해 사신과의 혈연 등을 연유로 자제군관으로 청나라 연경(북경)에 가서 그 곳 최고 문신들과 교류를 하면서 많은 관련 문헌을 구입하여 연구하게 되었다.
그 중 홍대용이 자제군관으로 사신인 숙부를 따라 연경에 갔다가 최고 문신들을 만난 후 관련 문헌을 구입하여 고증학, 금석학, 과학 등 실증적인 북학 공부를 하여 젊은 영재들의 우상이 되었다.
홍대용은 과거공부를 거부한 채 천문을 연구하여 지동설을 주장하였고, 혼천의 등을 제작하였으며 우리나라 천문대에서 발견한 별에 '홍대용'의 이름을 붙일 정도로 홍대용은 천문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추사의 양아버지인 김노영은 홍대용의 9촌 조카사위이고, 연암 박지원과 교류하면서 선진 학문인 북학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김노영은 사은사로 연경에 갈 때 초정 박제가와 동행한 적이 있고, 노론은 서얼에 관대한 편이므로 규장각 검서관인 서자 박제가와도 교류를 하였다.
초정 박제가는 4회 연경에 다녀오면서 연경 문인들과 깊은 교류를 한 관계로 북학사상을 집대성한 <북학의>를 저술하였다.
초정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소개하는 한편, 청나라를 모방하여 도로 확장, 수레 이용 물물교환, 벽돌 건물 신축 등 백성의 삶을 이롭게 하는 이용후생을 주장하였고, 양반들에게도 상업활동을 허락하여 전국에서 생산되는 물품이 백성들에게 골고루 싼값에 분배되도록 하는 중상주의 정책을 제안하였다.
이런 연유로 김노영은 양자인 추사의 스승을 선정함에 있어 성리학에 능통한 유학자 대신 새로운 학문인 북학사상에 정통한 실학자 초정 박제가를 스승으로 정한 것으로 보인다.
일설에 의하면 북학파의 대가인 초정 박제가가 추사의 글씨를 보고 추사의 생부 김노경에게 부탁하여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하나 신분제 사회에서 서자인 박제가가 먼저 제의를 하였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는 않는다.
추사는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이념적인 성리학으로부터 벗어나 실용주의적 북학사상에 심취하였고, 시대의 비주류인 서자, 스님, 여항(서민) 등과 교류하면서 학문의 외연을 넓힐 수 있었다.
▲추사 김정희가 당대 최고의 문인들과 친분을 맺게 된 행운
추사는 1786년생으로 초의선사, 다산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학유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초의선사는 전남 해남 소재 대흥사에 주석하면서 전통차의 맥을 이어받은 승려이자 다선일체를 체화하신 분으로 우리 전통차의 보고인 '동다선'의 저자로서 추사에게 불교와 선지식, 차의 심오함을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의선사는 추사의 ‘茶友’로서 힘겨운 제주도 유배 시절 자주 찾아가 우정을 나누었고, 차를 수시로 보내주어 풍토병과 소화불량 으로 고생하는 추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추사는 차를 마신 후 '눈 앞의 俗塵(속세의 티끌)이 사라진 듯 하다' 고 고마워 하였고, 초의선사가 차를 보내주지 않을 경우 '빨리 안보내면 몽둥이 30방을 칠테요,몹시 기다리오' 라고 애교를 부렸다.
초의선사는 추사가 71세에 사망한 후 제문을 지었을 정도로 훌륭한 친구였다.
정학유는 농가월령가를 지은 정약용의 둘째 아들이다. 추사가 다산 정약용으로부터 인품과 지식을 전수받을 수 있도록 교량 역할을 한 둘도 없는 친구였다.
추사는 초의선사를 통하여 22세 연하인 소치 허련을 제자로 받아들여 소치의 정신 세계를 다듬어 주고, 소치의 서예에 큰 울림을 주었다. 이로 인하여 소치는 헌종의 부름을 받아 어전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소치 허련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는 추사와 초의선사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하였고, 추사가 해배된 후 곁에서 시봉하면서 배움을 이어갔다.1856년 추사가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48세의 나이로 고향인 진도로 들어와 서예에 매진하여 남종화의 원조로서 조선 미술계에 큰 획을 긋는 훌륭한 서화가가 되었다.
추사는 청년기부터 초의선사, 정학유 같은 훌륭한 친구들과 교류하면서 우정을 나누었고, 소치 같은 훌륭한 제자를 두어 함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엄청난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추사는 이재 권돈인, 황산 김유근, 운석 조인영 등과 친분을 맺어 금석문, 고증학에 매진한 결과 무학대사비로 알려진 비석을 고증하여 진흥왕 북한산순수비임을 밝혀 내었다.
▲추사 김정희와 청나라 최고 문인 완원, 옹방강의 교류
초정 박제가는 당대의 최고 경륜가인 채제공과 정조의 배려로 연경을 4회 방문하면서 조강, 완원, 담계 옹방강과 교류하였고, 특히 완원과 친분을 유지하였다.
추사는 스승 박제가를 통하여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접하게 되면서 당시 청나라 최고의 문인이었던 완원과 담계 옹방강의 사상에 매료되었다.
추사는 10대부터 박제가를 통하여 완원과 옹방강을 사모하였고, 특히 옹방강을 사모하여 옹방강의 모든 것을 답습하려고 노력하였다.
추사는 당대 유명한 재력가이자 컬렉터인 담계 옹방강이 소동파를 사모하여 자신의 서실 현판을 '보소재' 라고 한 것을 모방하여 자신의 서실 현판을 '보담재' 라고 명명하였다.
추사는 옹방강의 제자 중에 천재인 추사 강덕량이 있는 것을 알고 자신도 강덕량과 같은 훌륭한 제자가 되겠다는 결의로 자신의 호를 추사라고 하였다.
추사는 24세 때인 1810년 10월경 호조참판인 생부 김노경이 동지사 부사로 선임되자 자제군관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꿀 귀중한 60일 여정의 연경길에 오르게 된다.
자제군관 제도는 고위 관리들 자제나 친척들에게 중국 선진문물을 견학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것으로 특별한 역할이 부여되지 않아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추사는 연경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서점가인 유리창에 가서 자신이 원했던 책 등 문물을 구입하는 한편 연줄을 이용하여 청나라 문인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추사는 먼저 유리창에 들러 평소 원하던 책을 구입하였고, 박제가의 추천으로 완원을 만나 필담으로 가르침을 받았다.
완원은 건륭제의 사고전서 편찬에 참여할 정도의 당대 최고 문인이었으므로 완원의 인품과 지적 수준에 감격하여 추사는 완원의 승낙을 받아 호를 '완당'으로 하였다.
추사는 연줄을 동원하여 78세 노인인 옹방강을 만나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였으나 옹방강은 매년 1월 한 달 동안 절에 바치기 위해 두문불출하면서 불경을 필사하는 관계로 그를 만나기가 매우 어려웠다.
추사는 귀국 며칠 전에 겨우 옹방강을 만났으나 옹방강은 젊은 조선인 추사를 탐탁치 않게 여겨 형식적인 만남을 가지려 하였다.
이에 추사는 자신이 10대 때부터 옹방강을 사모하여 서실 현판을 '보담재' 라고 하였고, 호를 강덕량 같은 제자가 되겠다는 다짐으로 추사라고 지었다고 말하면서 가르침을 받겠다고 간청했다, 이에 감격한 옹방강이 극히 예외적으로 추사를 자신의 서실인 보소재로 초대하여 귀중한 서책 등을 볼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제자로서 학문을 전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옹방강은 경제적 여력이 있어 열정적으로 소동파의 작품을 수집하여 보소재에 전시하였고, 추사는 소동파의 진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되어 이는 추사의 학문연구 방향에 크나큰 영향을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옹방강은 추사와 필담으로 서예와 금석학, 고증학, 경학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눈 후 추사의 천재성과 지식에 감격하여 추사에게 '해동 제일의 서예가'라는 친필을 건네주었다.
추사는 완원, 옹방강과 단 1회 만남을 가졌지만 그들로부터 받은 문화적인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그 후 수많은 서신 왕래를 통해 선진 학문인 고증학, 금석학 등 북학을 전수받아 독창적인 학문의 세계를 이룰 수 있었다.
추사는 1809년 11월 9일 24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대과에 응하지 않은 채 옹방강과 8년 동안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가르침을 받아 독창적인 학문의 세계를 이룰 수 있었고, 옹방강이 사망하자 32세에 비로소 대과에 응시하여 관료의 길을 걷게 된다.
추사 김정희가 연경에서 만상 임상옥으로 하여금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움을 준 추사가 자제군관으로 연경에 갈 때 거상인 만상 임상옥도 중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조선 인삼을 팔기 위해 사신단 일행으로 함께 갔다.
조선은 공무역만 인정하였고, 역관(통역관)들에게 급여 대신 공무역 자격을 부여하였으므로 상인들은 역관의 공무역을 이용하여 중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인삼, 호피 등 상거래를 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다.
임상옥이 연경에서 인삼을 판매하려고 하자 연경의 거간들이 임상옥의 약점을 이용하여 담합한 후 인삼 가격을 엄청나게 싸게 책정하여 이를 강요하였다.
임상옥은 중국 거간들의 요구를 수용할 경우 엄청난 손해를 감수할 수 밖에 없고, 그렇다고 인삼을 국내로 가져갈 수도 없어 진퇴양난의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자 추사에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자문하였다.
추사는 임상옥에게 중국 거간들이 담합이라는 극단적인 벽을 친 것에 대항하여 본인도 이에 대항하는 이열치열의 극단적인 벽을 치라고 조언을 하였다.
임상옥은 추사의 조언에 따라 중국 거간들이 보는 앞에서 인삼 전량을 모아놓고 불을 지르는 극단적인 처방을 함으로써 중국 거간들의 항복을 받아 더욱 더 비싼 가격에 인삼을 판매할 수 있었다고 한다.
추사는 인간의 심리를 꿰뚫는 지혜로움도 함께 지녔던 것으로 평가된다.
▲추사 김정희의 '가야산 해인사 중건 상량문' 지음
1817년 순조 17년에 해인사 대장경판과 장경판전을 제외한 나머지 1000여 칸의 대가람이 일시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당시 추사의 생부 김노경이 경상감사로 재직하였고, 감사의 지원에 힘입어 대적광전이 중건될 때 31세의 김정희가 생부의 제의로 '가야산 해인사 중건 상량문'을 지었다.
이로써 추사는 화엄사찰의 대본산인 해인사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경주 김씨 추사 김정희의 흥망성쇠
추사의 집안은 영조 때부터 명문가의 집안으로서 권세를 누렸고, 정조가 사망한 후에는 집안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어린 순조를 대리하여 수렴청정을 함으로써 더욱더 권세를 누렸다.
순조가 장성하여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게 되자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과 그의 일파인 장동 김씨가 세도가로 등장하게 되면서 경주 김씨의 세도는 잠시 주춤하게 된다.
순조가 장동 김씨의 권세에 염증을 느껴 아들인 효명세자에게 왕권을 양위하자 효명세자는 외조부인 김조순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추사의 생부 김노경과 추사를 중용하였다.
그러나 효명세자가 3년 후 급사하게 되자 장동 김씨 세력들은 윤상도 상소 사건을 계기로 정적인 김노경을 배후로 지목하여 강진현 고금도로 유배 보냈다가 3년 후 해배하였다.
추사는 생부가 유배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생부의 유배 생활을 보살폈고, 순조 행차에 2회에 걸쳐 격쟁(괭과리를 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으로 생부의 억울함을 호소할 정도로 효심이 깊었다.
어린 헌종이 즉위하자 장동 김씨 세력은 또다시 윤상도 사건을 빌미로 추사가 상소문을 대필하였다는 억지 혐의를 씌워 추사를 고문으로 죽이거나 사형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추사는 55세인 1840년 9월 4일 과거급제 동기로서 친한 벗이자 고명대신(순조의 유언 받듦)인 우의정 운석 조인영의 간곡한 상소로 사형 다음으로 중형인 원악도 위리안치형을 받은 후 제주도 최남쪽에 위치한 대정에서 63세인 1848년 12월 6일까지 8년3개월 동안 혹독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조인영은 추사와 함께 금석학에 심취하여 무학대사 비로 알려져 있던 비석이 진흥왕 북한산 순수비임을 밝혀낸 당대 문인으로서 효명세자비인 조대비의 당숙이자 세도가인 점을 이용하여 추사를 조대비에게 간청하여 사형을 면하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유배형이 내려졌어도 한강을 건너기 전에는 다시 의금부로 송환하여 재신문을 할 수 있었으므로 헌종은 추사에게 밤을 세워 한강을 건네게 하였고, 다음 날 이를 알게 된 장동 김씨들이 추사의 재소환 신문을 강력히 요청하여 헌종이 이를 승인하였으나 이미 한강을 건넜으므로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추사가 충청도 암행어사로 임무 수행 중 탐관오리로 소문이 자자한 장동 김씨인 비인현감 김우명을 고위직들의 청탁에도 불구하고 파직하자 앙심을 품고 추사를 극형에 처하려고 갖은 묘책을 꾸몄다고 한다.
추사는 세도가 김조순의 아들 황산 김유근과 절친이었고, 김유근이 해배시켜줄 것으로 큰 기대를 하였으나 김유근은 병석에 누워있으면서 추사가 유배가는 줄도 모른 채 유배 도중 사망하였다. 이에 추사는 크게 낙담하였다.
제주도 해배 후 2년여 만인 1851년 7월 22일 절친인 영의정 이재 권돈인이 철종 때 철종의 고조 신주를 종묘 영녕전으로 옮기는 조천 문제로 인해 유배를 갔다. 추사는 권돈인의 배후로 지목되어 북청으로 유배를 갔다가 1년 후 1852년 8월13일 해배되었다.
추사의 일생에 제주도, 함경도 북청 유배가 없었다면 오늘의 추사 김정희가 없었을 것이므로 이는 조물주의 큰 계책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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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는 당대 최고의 세도가인 경주 김씨 집안에서 태어나 영조의 부마인 월성위 집안 양자로 들어가 왕실의 인척이 되었고, 타고난 천재성으로 어릴 적부터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아온 관계로 유아독존적 사고와 행동을 보였다.
제주도 유배 길에도 전주에서 ‘流水體’로 칭송받는 서예가이자 추사(55세) 보다 16살 연상인 71세의 창암 이삼만으로부터 친필 평가를 의뢰받고 창암의 제자들이 있는 가운데 '노인장께선 시골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고 하여 인신공격적인 행태를 보였다.
이에 대해 창암은 '저 사람이 글씨를 잘 아는 것 같지만 조선 붓의 해지는 멋과 조선 종이의 스미는 맛은 잘 모르는 것 같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전남 梨津에 도착하여 의금부도사들을 보낸 후 해남 대흥사로 초의선사를 찾아가 당대 최고의 문인인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보고 초의선사에게 '원교는 조맹부체의 덫 안에 추락한 글씨의 기본도 모르는 자이니 원교의 현판을 떼어 내리고 내 글씨를 달게' 라고 말한 후 자신의 글씨로 대웅전 현판을 쓴 후 걸도록 하였다고 전해진다.
원교 이광사는 소론으로서 영조 때 나주 괘서사건으로 역모로 몰렸으나 뛰어난 재주로 감형받아 부령, 진도, 신지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고, 유배시절 해남 대흥사, 강진 백련사, 고창 선운사, 구례 천은사 대웅전 현판 글씨를 썼으며 원교로부터 글씨를 받으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원교의 아들은 <연려실기술>을 쓴 이긍익이다.
원교는 1777년에 죽었고, 추사는 1786년 생이므로 서로 만나지는 못하였다.
이에 대하여는 추사가 의금부 신문 과정에서 6회에 걸쳐 36대 곤장을 맞아 초주검이 된 후 형틀을 매고 압송 기한 13일(추사는 유배 선고 후 23일 만에 도착) 내에 제주도에 도착해야 하는 상황을 이유로 유배길을 이탈하여 해남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를 만났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다.
추사는유배 중에도(당시 58세) 당대의 선사이자 화엄종의 종장인 77세의 백파 스님과 왕복서한으로 2회에 걸쳐 일대 논쟁을 벌였다.
전북 고창 선운사에서 출가한 백파 스님은 50세에 '禪門手鏡'을 펴냈고, 선문수경에서 선을 '의리선, 여래선, 조사선' 으로 구분한 후 조사선을 우위에 놓으면서 ‘마음의 맑음은 佛의 大機이고, 마음의 밝음은 法의 大用’이라 하였다.
이에 대해 초의선사는 '선문사변만어' 를 펴내 백파스님을 비판하였고, 추사는 편지에 '백파妄證15조'를 열거하여 백파 스님의 논지를 비판하였다.
추사는 "‘백파망증15조'에 '매양 80여 년 공을 쌓은 나이인데 그 누가 나를 넘어설 수 있느냐' 고 호언장담하더니 그 공 쌓은 것이 겨우 이것인가. 아무런 심증도 없이 이것 저것 주워 보태어 입으로만 지껄이는 그 꼴이 점점 볼만하도다" 라고 거칠게 비하하였다.
백파 스님은 추사 편지를 읽은 후 '그 양반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려고 덤비는 사람이구만' 이라고 가볍게 받아넘겼다고 한다.
백파 스님의 법을 이은 曼庵 송종헌, 石顚 박한영 스님은 동국대 전신인 중앙불교 전문학교 설립을 주도한 후 교장을 역임하였고, 석전 박한영 스님은 서울 안암동 소재 개운사에서 주석하면서 제자인 서정주, 조지훈 시인에게 심오한 불교사상을 전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사가 2회에 걸쳐 유배를 간 것도 추사의 올곧은 성격과 독단적 성격에 연유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추사 김정희의 제주도 유배 중 추사체 완성, 북청 유배 중 황초령 진흥왕순수비 보존
추사는 8년3개월의 기나긴 제주도 유배 생활 중 풍토병으로 인한 소화불량 등으로 심한 고통을 당하였고, 가족들은 유배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가산을 탕진하였고, 처가 사망하였고, 가까운 친구들이 인연을 멀리하는 등으로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추사는 극한의 유배 생활에도 고난을 극복하고 연구에 매진한 결과 독창적인 서체인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추사는 제주 유배생활 중 추사체에 대하여 '세상의 글씨를 다 보고 여기에서 나와 내 방식으로 그렸다(入於有法 出於無法 我用我法)' 고 말하여 추사체의 완성 과정을 설명하였다.
추사는 역사를 다 소화하고 자기 식으로 추사체를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추사는 함경도 북청에서 1년간 유배 생활을 하던 중 제자이자 함경도 관찰사인 침계 윤정현으로 하여금 황초령 진흥왕순수비를 보존하도록 하였다.
황초령 진흥왕순수비는 마을 주민들이 진흥왕순수비로 인해 관료들 접대와 탁본 등으로 노역에 시달리게 되자 비석을 조각내어 매립하는 등으로 파손하였으나 추사의 관심과 노력으로 현재까지 보존하게 되었다.
다산 정약용이 18년간의 유배 생활에 적응하여 열심히 연구한 결과 엄청난 저서를 남길 수 있었고, 추사도 9년3개월 동안 유배 생활로 인해 독창적인 사상 세계를 이룰 수 있었던 점을 보면 위대한 사람들은 위기의 시기에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됨을 알게 된다.
▲추사 김정희와 세한도
‘歲寒然後 知松栢後彫’(겨울이 온 후에야 송백이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
추사는 세한도를 붓으로 쳐(그려) 그린 후 이를 제자이자 역관인 우선 이상적에게 보내주었다.
'세한도를 친다'라고 표현한 것은 붓으로 사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추사의 思意, 즉 마음, 사상 등을 표현한 것에 중점을 두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대부분의 추사 연구가들은 추사가 제자인 우선 이상적이 유배 후에도 변함없이 중국에서 많은 서적을 구입하여 보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세한도를 쳐 주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추사가 세한도를 친 것은 우선 이상적이 중국에 사신을 따라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이 유배 중에도 완당, 옹방강의 연구를 본받기 위해 열심히 몸과 마음을 연마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연경에 있는 문인들에게 전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선 이상적이 연경에 가서 문인들을 초대한 후 세한도를 보여주어 추사의 서예 실력과 지적 수준을 감상하도록 한 후 이에 대해 댓글을 달도록 한 점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아울러 옹방강이 존경하는 소동파가 유배 중인 자신의 처지를 나타내기 위해 그린 언송도에 빗대어 추사가 소나무를 지붕에 기대어 가지를 늘어지게 한 부분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추사가 연경 문인들로 하여금 조선 중신에게 영향을 끼쳐 자신을 해배하도록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추사는 추사체로 세한도를 쳤고, 이로 인해 자신의 사상과 추사체 진수를 후손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으므로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하겠다.
후지쓰카 지카시는 일본의 대표적인 동양철학자로서 1921년부터 2년간 중국에 머물면서 청나라 경학과 고증학을 연구하던 중 조선의 박제가가 청나라 유학자들과 깊은 교류를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경성제국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인사동 고서점을 통하여 박제가, 이덕무,유득공, 이서구 등 규장각 사검서가 발간한 사기시집 외에 책 1,000권, 서간과 탁본 1,000여점을 수집하였고, 그 과정에서 추사의 세한도를 보유하게 되었다.
후지쓰카 지카시는 귀국하면서 세한도를 가져갔고, 고전 수집가였던 소전 손재형의 간곡한 요청으로 무상으로 반환하였으며 며칠 후 그 집이 미군 도쿄 공습에 의해 전소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귀중한 보배가 아닐 수 없다.
후지쓰카 지카시의 아들인 후지쓰카 아키나오는 2006년 94세 때 '동경도서관에서 먼지 속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인이 계속 추사를 연구하는데 이용해달라' 는 당부 말씀과 함께 아버지가 소장하던 추사를 포함한 관련 유물과 책 1만5,000점을 과천문화원에 기증하였고, 대한민국으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여 받은 후 2개월 뒤에 사망하였다. 참으로 훌륭한 집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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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는 제주도 유배길에서 호송관인 금오랑(의금부도사)과 지방 수령, 호족들의 부탁을 받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글을 많이 써주었고, 해배 후에는 서자 김상우의 곤궁함을 배려하여 글을 남발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한 자책으로 추사는 사망 전에 절필을 선언하였으나 강남 봉은사 주지의 간청으로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板殿(경판을 보관하는 곳)을 쓴 후 3일 후 71세로 돌아가셨다.
저는 서울지방검찰청에 근무하던 중 개운사 말사인 보타사에서 고시공부를 하면서 친분을 맺은 허주스님이 봉은사 교무부장으로 판전에 기거한 인연으로 영광스럽게도 판전과 하룻밤 인연을 맺은 적이 있다.
▲당부의 말씀
우리 법조인들이 추사에 대한 관심을 갖고 온고지신으로 그의 인생 궤적을 살펴봄으로써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추사의 삶과 죽음, 학예에 대해 주마간산 격으로 글로 써보게 되었다.
선후배 변호사님들께 가벼운 마음으로 이 글을 읽어주시길 바라면서 이 기회에 안부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정교순(법무법인 유앤아이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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