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광천식당 골목에 서서

  • 오피니언
  • 우난순의 식탐

[우난순의 식탐] 광천식당 골목에 서서

  • 승인 2023-12-06 10:13
  • 신문게재 2023-12-07 18면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KakaoTalk_20231206_093316505
'인정이 몹시 그리워지는 어느날 나는 남장(男裝)을 하고 거리에 나섰다.' 가을과 겨울의 경계에서 나는 소설의 이 매혹적인 첫 문장을 떠올린다. 그것은 의도적이지 않다. 그저 몸으로 체득한 강렬한 경험의 기억같은 것이랄까. 나는 초록색 아망구를 푹 눌러쓰고 플라타너스 길을 따라 걸었다. 빗물에 젖은 가랑잎들은 나른하고 묵직했다. 낙엽은 어떠한 고통도 없이, 어떠한 존엄도 없이 몇 번의 비가 더 내린 뒤엔 산산이 흩어질 것이다. 벙벙한 파카를 입은 긴 머리의 어린 여자가 담벼락에 붙어서 담배를 피운다. 하얀 연기가 몽글몽글 오르다 금세 흔적없이 사라진다. 삶이 그럴까.

휴일 오후를 하릴없이 헤맸다. 어느새 먹색의 하늘엔 흰 달빛이 음습하게 비추고 있었다. 나는 무엇에 홀린 듯 길을 꺾어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여기는 아직도 내 청춘의 한 시절에 머물러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골목은 바뀌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다만 인적이 드문 적막감만이. 친구와 뻔질나게 드나들던 이수락은 자취를 감췄다. 새콤매콤한 쫄면을 생각하자 침이 고였다. 아! 광천식당. 대전의 명물 두부두루치기의 원조 아닌가. 대학 다닐 때 여기서 과 모임도 했었는데. 두툼한 두부가 쟁반만한 접시에 가득 담겨 나오는 집. 두부가 꽤 매워 여자동기는 위염이 있다면서 두부를 물에 헹궈 먹었지. 식당 안에서 손님들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나는 어두운 골목에 서서 코를 훌쩍였다. 가슴이 먹먹해서 눈물이 난 게 아니었다. 칼바람에 코끝이 찡해서였다.

대림관광호텔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여긴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는 곳이다. 어느날 길을 걷는데 낯선 남자가 차 한잔 하자고 했다. 차려입은 폼을 보니 영락없는 제비족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우리는 대림호텔 로비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오렌지주스를 시키고 탐색을 시작했다. 긴장과 흥분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줌이 마려웠으나 주스에 수면제를 탈까봐 꾹 참았다. 덥석 따라온다 싶었는데 빤히 쳐다보며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이 아무래도 잘못 짚었다는 생각을 했는지, 운도 지지리도 없는 제비족은 허탈한 표정으로 찻값을 계산했다. 그 백바지 신사는 안녕하실까.

나는 어둠 속을 두리번거렸다. 찻집의 불빛이 이교도의 눈처럼 은밀하게 반짝였다. 자그마한 식당 출입문에 붙은 '오늘의 메뉴 제육볶음, 북엇국, 계란말이'를 보고 문을 열었다. 중년의 사내가 등을 돌리고 밥을 먹고 있었다. 말수가 없고 차분한 표정의 주인 아주머니가 열심히 손을 놀렸다. 단발머리의 젊은 여성은 경쾌하게 음식을 날랐다. 모녀지간이라고 했다. 밥상이 정갈하고 소박했다. 북엇국을 한 술 떠먹었다. 구수하고 칼칼한 게 언 몸이 확 풀렸다. 점심에 찹쌀떡과 곶감을 먹은 탓에 매콤한 것이 끌렸는데 마침맞았다. 오랜만에 먹는 제육볶음에 계속 손이 갔다. 된장으로 무친 쌉쌀한 머위와 무생채는 또 달래서 먹었다. 전기난로의 빨간 불빛이 아궁이 같았다. 쪼맨할 때 불을 때는 엄마 옆에 찰싹 붙어 활활 타는 불을 쬐며 졸던 추억. 누렁이도 내 옆에서 꾸벅꾸벅. 밥은 모성이라고 했던가. 시인 이성복은 '오 밥이여, 어머니 젊으실 적 얼굴이여!'라고 썼다.

골목은 아련한 추억이 밴 원초적인 무언가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흘러가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는 장소. 쓸쓸함과 진한 사람 냄새로 얼룩진 내 영혼의 안식처. 개발논리에 허물어지는 도시의 후미진 뒷골목에 대한 애착은 나의 이기심일까. 밤하늘에 홀로 떠 있는 별이 구름에 숨었다 나타난다. 별이 얼음조각처럼 차가울 것 같다. 골목 입구에 트럭을 세워놓고 귤을 파는 남자가 손을 비비며 서성거린다. 귤 한 봉지를 사서 '이층에서 본 거리'를 흥얼거리며 타박타박 집으로 향했다. <지방부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세종시, '영화·드라마' 촬영 명소로 간다
  2. [대전 전통산업 특화거리의 새로운 미래를 그리다] ①대전 전통산업과 특화거리의 탄생과 번영…그리고 존폐의 기로
  3. 두 자녀 태우고 만취운전 30대 사고까지…여름철 엄격 단속 필요
  4. 창업기업 74곳에 최대 4억원 '대전 창업기업 들썩'
  5. K리그 휴식기, 대전 서포터즈는 '청소' 중?… "승리의 기운을 줍습니다"
  1. 폐현수막의 변신은 ‘무죄’
  2. 우송대 응급구조학과 학생들, ‘실무능력 UP’
  3. 천문연구원, 희귀 왜소신성 발견…공전주기 짧아 중요 연구대상
  4. 대전 보건소 인력부족에 '허덕'…전국 광역시 중 가장 적어 보건의료 '빨간불'
  5. 충남대병원, 교육부 주관 경영평가서 A등급…국립대 중 유일 7년 연속

헤드라인 뉴스


삼전닉스 호남 투자 가시화…충청은 생색내기용 전락

삼전닉스 호남 투자 가시화…충청은 생색내기용 전락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광주·전남에 수백조원에 달하는 반도체 생산기지 구축에 나설 것이 유력해지면서 충청권은 곁다리 투자에 그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충청권의 경우 두 기업이 막대한 고용창출 등이 기대되는 대규모 생산 라인이 아닌 AI데이터센터 건립으로 기우는 모양새인데 이럴 경우 지역 경제 파급 효과가 미미하기 때문이다. 코스피 시총 투톱으로 글로벌 메모리 업체인 두 기업이 이재명 정부의 강력한 지역균형 발전 정책에 부응하려면 충청권에도 생색내기 용이 아닌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23일 정치권과..

"대전 도시철도 2호선 트램 개통 2030년 하반기로 늦어진다"
"대전 도시철도 2호선 트램 개통 2030년 하반기로 늦어진다"

대전도시철도 2호선 트램 개통이 2030년 하반기로 지연된다고 대전시가 공식 인정했다. 당초 2028년 개통보다 2년여가 더 늦어지는 것으로, 주요 공정 리스크와 차량 시운전 계획 반영 등을 이유로 꼽았다. 유득원 대전시 행정부시장은 23일 대전시청 기자회견장에서 도시철도 2호선 트램 관련 브리핑을 갖고 "향후 통합공정 계획 수립을 통해 개통 일정 등을 최종 확정할 것"이라면서 개통 지연을 공식화 했다. 도시철도 2호선 트램은 총연장 38.8㎞, 정거장 45곳, 차량기지 1곳 규모로, 2024년 12월 착공해 현재 본선 14개 전..

[대전 전통산업 특화거리의 새로운 미래를 그리다] ② ‘생산성을 넘어 브랜딩을 창출하라’
[대전 전통산업 특화거리의 새로운 미래를 그리다] ② ‘생산성을 넘어 브랜딩을 창출하라’

대전 중구 중촌동 맞춤패션거리와 정동 인쇄거리, 원동 한복거리 등 과거 대전을 상징하던 유서 깊은 산업 자산들이 중대한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다. 자구책 마련을 위해 붙여진 특화거리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급격한 산업 구조 변화와 유통 시스템 현대화 속에서 경쟁력을 잃어간 채 존폐의 기로에 서면서다. '생산의 효율화'란 거대한 산업 발전 흐름이 오늘날 현대 사회의 모든 가치를 장악하고 있지만, 지역의 고유한 숨결과 정체성이 담긴 전통산업의 흔적이 미래세대에 적절히 계승돼야 마땅하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낡은 산업의 미래를 새..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문창동 화재피해 복구 돕는 손길 문창동 화재피해 복구 돕는 손길

  • ‘대한민국을 응원합니다’…월드컵 응원 고조 ‘대한민국을 응원합니다’…월드컵 응원 고조

  • 폐현수막의 변신은 ‘무죄’ 폐현수막의 변신은 ‘무죄’

  • 우송대 응급구조학과 학생들, ‘실무능력 UP’ 우송대 응급구조학과 학생들, ‘실무능력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