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만필] 만우절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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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만필] 만우절 학교

김장규 서천교육지원청 장학사

  • 승인 2025-05-08 17:05
  • 신문게재 2025-05-09 18면
  • 오현민 기자오현민 기자
20250508_서천교육지원청 장학사 김장규
서천교육지원청 장학사 김장규.
봄빛으로 물빛으로 가득했던 4월이 일찌감치 지나버렸다. 4월은 만개한 벚꽃과 살구꽃 사이를 지나는 바람에도 온 몸의 감각이 예민하게 봄에 닿는다. 나무 줄기를 타고 잎으로 퍼지는 물 냄새가 기분 좋게 코를 자극한다. 기후위기로 봄을 잃어가는 요즘 그나마 가장 확연하게 봄이 묻어나는 시기가 바로 4월인 듯하다.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던 시절에는 '봄은 겨울의 죽음'이라고, 그래서 4월은 잔인한 달일 거라고 물구나무서듯 생각해 보기도 했다. 아무튼 4월은 여러모로 특이한 혹은 특별한 달이다. 그 달의 첫날을 거짓말로 시작한다는 점도 그러하다. 만우절, 교단에서 학생들과 지내는 동안 늘 기대되던 하루이다.

"선생님 지금 국어시간 아닌데요?"와 같이 눈에 보이는 거짓말, 교실에서 학생들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마술, 책상과 의자를 포함한 교실의 모든 것을 심지어 학생들까지 바닥에 옆으로 붙어 공간 전체를 왜곡하는 수준의 정성스런 장난까지. 학교에서 겪는 만우절은 지금도 무궁무진한 사례를 남기고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곤란해했던 것은 바로 쌍둥이들의 만우절 장난이다. 원래 사람 얼굴을 잘 구별하지 못해서 평소 어느 정도 안면이 있던 사람도 전혀 낯선 곳에서 마주치면 금세 알아차리지 못한다. 몇 해 전 우리반에 쌍둥이 형제 중 한 명이, 나머지 한 명은 옆반에 배정된 적이 있었다. 학기 초에는 이 둘을 구분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애를 먹었다. 그렇게 한 달을 지내고 만우절 아침. 나는 전혀 긴장하지 않은 척 교실에서 등교하는 아이들을 기다렸다. 다행히도 그날 아침의 나는 운이 좋았다. 능청스럽게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와 아침 조례를 받고 앉아 있는 저 아이가 우리반 ○○인지, 옆 반의 쌍둥이 □□인지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학생들의 안부를 묻고 일과를 안내하는 조례를 마치며, 사실 □□이지만 오늘 아침은 ○○로 와 앉아 있는 그 아이를 일부러 ○○로 불렀다. 아이는 이제 자신의 장난이 완벽히 성공했음을 느끼고 자못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그리고 내가 웃으며 말했다.

"□□이는 가방 챙겨서 나랑 같이 너네 교실로 가자. 나 1교시에 너네 반 수업이야. 그리고 우리반 전달사항은 네가 이따 ○○한테 전해 줘."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아이들과 그래도 재밌다고 웃고 떠드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올해 만우절도 무사히 넘겼다고 안도하며 교실을 나왔다. 바로 전날 옆반 담임선생님과 '우리 내일 절대로 속지 말자'고 다짐했던 덕분이다.

학교에서 만우절 장난이 유난히 재미있는 것은, 학교라는 공간을 채우는 시간의 농도와 관계 깊다. 3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학교의 시간은 조금씩 무르익어 간다. 새학기를 맞아 낯선 교실을 적응하고 서로 관찰하며 부딪치는 한 달의 시간 동안 학생들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좁아진다. '신뢰'가 쌓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만우절 장난에는 그 신뢰가 필요하다. 모두 같은 마음으로 한바탕 열연을 펼칠 수 있는 신뢰, 그리고 이 정도의 장난은 선생님도 충분히 함께 즐길 수 있을 거라는 신뢰. 그렇게 싹튼 신뢰가 5월의 소풍과 체육대회를 거치면서 개성 있게 맞춘 학급 티셔츠처럼 교실을 물들인다. 학교는 항상 그랬던 것 같다.

전직을 하고 서천교육지원청에 와서 지낸 지 1년이 넘었다. 한 걸음 벗어나 만나는 학교는 예전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교육청 건너편 학교에서 들리는 종소리,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가득 채우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여전하지만 교육지원청 업무담당자로서 학교폭력 사안이나 교육활동 침해 사안 등으로 학생들을 마주할 때면 마음이 무겁다. 감정을 비우고 사실관계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정한 심의를 위해 거짓말이어서는 안 되는 말들의 조각을 맞추다 보면, 결코 유쾌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은 또 다른 만우절이 학교를 뒤덮게 될까 염려된다.

만우절 학교. 함께 같은 마음으로 신뢰를 쌓으며 웃고 깊이 익어가는 학교라면 좋겠다. 같은 교실 같은 학교에서 친구와 같이 배우고 어우러지는 시간이 온전히 성장의 과정이었으면 좋겠다. 그러한 교육을 위해 나 역시 제 몫을 해내고 싶다.

짧지만 짙은 봄을 지나 여름과 가을로 나아가는 학생들의 성장을, 학교 공동체의 회복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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