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하추동]튜브 물감과 인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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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하추동]튜브 물감과 인상주의

백향기 대전창조미술협회 회장

  • 승인 2025-05-13 17:02
  • 신문게재 2025-05-14 18면
  • 임병안 기자임병안 기자
백향기
백향기 대전창조미술협회 회장
화실에는 그림작업에 필요한 온갖 물건들이 가득하다. 그중에서 물감은 온갖 색상의 것들이 즐비하고 다양한 종류의 안료, 질감을 표현하는데 필요한 각종 재료들과 함께 테이블을 가득 채우고 있다. 나는 아크릴 물감을 주재료로 쓰기 때문에 통에 담긴 물감을 필요한 만큼 떠서 사용한다. 예전에는 서양화는 튜브에 담긴 유화 물감을 주로 사용했지만 요즘에는 물감의 종류와 방법들이 매우 다양해서 그림 물감을 어느 한 가지로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일상생활에서도 어릴 적과 비교해 보면 새로운 물건들이 엄청나게 많이 생겨났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들이나 발명품들은 새로운 물건이 가져다 주는 편리함 뿐 아니라 생활이나 활동방식, 나아가 사고나 인식의 틀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전구는 어두운 밤을 밝게 비추어 환한 세상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로 인해서 해뜨면 일어나고 해지면 잠자는 인간의 습성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밤늦게까지 더 일하고 더 활동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밤까지 일하거나 공부하는 일은 과거에는 일상적인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축음기도 기계에서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해서 음악의 연주와 감상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음악이 산업화하는데 큰 영향을 가져다 주었다. 요즈음 흔하게 사용하는 컴퓨터나 이에 기반한 다양한 전자 기기들 역시 큰 변화를 가져와서 이메일은 연인들간의 손편지를 없애 버렸고, 은행에 가지 않고도 송금하거나 입금을 받고, 소설가는 원고지에 만년필이나 연필로 원고를 쓰는 대신 자판을 치면서 소설을 쓰는 방식으로 바꾸어 놓았다.

손글씨로 소설을 쓸 때와 자판으로 소설을 쓸 때 소설의 내용구성이나 작업방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하다. 미술에서도 새로운 물건의 출현이 그리는 방식이나 그리는 결과물, 대상을 관찰하는 방식에 상당한 영향을 주는 일을 경험해 왔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물감을 들 수 있다. 원래 물감은 대부분 자연재료로 만들었기 때문에 공방에서 제조하거나 제조자로부터 입수하여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감은 주로 광물을 분쇄하여 적당한 액상의 물질과 혼합해서 만들다가 19세기 들어서면서 화학적 제조방법들이 본격화하지만 그것을 담는 용기는 주로 돼지방광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휴대하기 불편하고 쉽게 손상이 되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휴대하여 가지고 다니기 어려운 조건이었기 때문에 공방 안에 머물면서 그리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1841년 주석을 주재료로 하는 튜브형 물감이 개발되면서 양상이 전혀 다르게 바뀌어 갔다. 물감을 휴대하고 다니기가 용이해진 것이다. 야외에 나가 실제 경치를 보면서 그리는 방식은 그림의 형식과 내용에 변화를 가져왔다. 같은 풍경이라도 시간과 날씨에 따라 다르게 포착된 느낌, 순간적인 감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인상주의라는 전혀 새로운 화풍을 가져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르누와르는 "만일 튜브물감이 없었다면 모네도, 세잔도, 피사로도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인상주의도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물감을 담는 용기 하나가 새로운 화풍, 즉 작가 개인이 포착한 느낌을 그대로 담아내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표현의 태도와 방법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그러한 변화를 생각하면 최근에 이루어지는 다양한 기술의 발전과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물건들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궁금하다. 튜브형 물감처럼 사소해 보이는 물건이 가져온 엄청난 변화를 생각하면 기대가 되기도 하지만 속도가 너무 빠르고 빈도가 많으면 자율적인 조정이 이루어지기도 하는 것같다. 텔레비젼의 발명은 라디오를 소멸시킬 것이라고 예측하였지만 전혀 다르게 라디오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 독자적인 영역을 굳건히 지키고 있고, 디지털 음반은 LP를 없애버리는 듯하더니 여전히 LP 레코드의 감성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기도 하다. 세상은 늘 변하기 마련이지만 사람들이 모두 속도 빠른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변화의 호흡이 좀 길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천천히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이 주는 즐거움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백향기 대전창조미술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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