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필톡] 한 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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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난순의 필톡] 한 잔 할까?

  • 승인 2016-04-07 09:46
  • 우난순 교열팀장우난순 교열팀장
▲ 사진=tvN 응답하라 1988
▲ 사진=tvN 응답하라 1988

몇 년 전 초여름에 속초에 갔을 때였다. 저녁 먹을 곳을 찾아 헤매다가 간신히 눈에 띄는 허름한 식당에 들어갔다. 손님은 나 혼자였다. 그때 된장찌개를 시켜 먹었는지 육개장을 먹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뜻밖의 가슴 훈훈한 만남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늦은 저녁이라 이제 받을 손님도 없게 되자 주인 아주머니와 아저씨 그리고 친구인 듯한 또다른 아저씨가 내 옆 테이블에서 곱창전골을 안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결에 나도 합석을 하게 됐다. 못 마시는 술이지만 소주잔을 부딪치며 곱창전골을 먹으면서 여행지에서의 짧은 인연에 들떠 시간가는 줄 몰랐다. 다들 얼굴이 불콰해지자 주인 아주머니는 살아온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알고보니 주인 내외는 고향이 당진으로 한동네서 살다 눈이 맞아 보따리 하나만 들고 속초까지 오게 됐단다. 부모들의 반대로 밤도망을 쳐 낯선 타지에서 갖은 고생으로 자식들 키우며 열심히 살았단다.

아직 한번도 고향을 찾지 못한 설움에 주인 아주머니는 연신 소주잔을 기울였다. 내가 대전에서 온 걸 알고 고향사람이라도 만난듯 내 잔에 술을 채워주며 많이 먹으라며 곱창을 자꾸 밥 위에 얹어줬다. 어둠이 짙어 가는 속초의 늦은 밤, 희미한 불빛 아래서 주고받는 술잔이 왜그리도 가슴 아리게 하는 지….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술좀 하는 사람들은 술맛을 모르는 사람은 인생의 멋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내 기를 팍 죽여놓기 일쑤다. 소싯적부터 소원이 있었다. 술과 담배를 잘하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 대학 다닐 때 담배 한갑을 사서 두 개비 피워보고, 담배를 고혹적으로 피우는 그레타 가르보 근처에라도 가보자는 꿈을 접었다. 목이 너무 아프고 따끔거려 눈물을 머금고 담배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했다.

술 역시 나와는 인연이 없지만 어릴 적 술로 인해 호되게 경을 친 일이 있다. 초등 1학년 어느날 나와 친구는 어른들을 따라 밭으로 놀러갔다. 어른들이 보리를 베고 있는 사이 우리는 새참으로 내온 막걸리를 어른들 몰래 주전자 주둥이를 입에 대고 홀짝홀짝 마신 게 화근이었다. 달착지근해서 마시다 보니 그만 취해 버린 거였다. 결국 토하고 울면서 엄마 손에 이끌려 집에 와 저녁도 못먹고 다음날까지 숙취에 시달렸다.

일찍이 인간은 술이야말로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예찬했다. 술은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많은 관습과 해악을 남겼다. 마법의 약이기도 한 술은 오늘날 수천여 종이 존재한다. 천의 얼굴을 한 술은 그래서 더욱 인간을 매료시킨다. 아직 마셔보지 않았지만 깔바도스는 언젠가 꼭 한번 맛을 보고 싶은 술이다. 깔바도스는 레마르크의 소설『개선문』에서 주인공 닥터 라빅이 즐겨 마시던 술이다. 전쟁을 앞둔 1930년대 말, 암울한 도시 파리의 절망과 불안 속에서 닥터 라빅과 존 마두는 깔바도스를 마시며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입맞춤을 한다.


▲ 사진=KBS드라마 '직장의 신'
▲ 사진=KBS드라마 '직장의 신'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이렇게 고단한 삶을 위로해 주고 기꺼이 쾌락의 도구가 되는 이 신비스런 액체는 폐해도 적지 않았다. 알코올 중독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금주법이 시행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시대 가뭄 등으로 먹을 식량이 부족할 때 곡물로 술을 빚지 못하도록 했다. 1920년대 미국의 금주법은 청교도의 영향으로 시행됐지만 14년만에 폐지되고 말았다. 가장 큰 이유가 갱조직이 성장한 배경에 금주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금주법은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것이다. 술 때문에 고통 당하고 상처 받고 파괴되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마녀와도 같은 이 술에 매료되는 걸 어찌 막을 수 있을까. 특히 우리나라처럼 술문화가 과격하고 격정적인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 중 폭탄주는 필요악처럼 우리 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음주문화로 자리잡았다. 폭탄주는 군사문화의 잔재, 극한의 음주법으로 여겨 척결대상이지만 폭탄주를 돌리는 술자리는 앞으로도 건재할 것으로 보인다.

개인의 주량이나 선호를 배려하지 않고 무조건 줄이어 마셔야 하는 폭탄주는 술을 못 마시는 사람에겐 공포의 대상이다. 술꾼들은 환호작약하지만 술이 안 받는 사람들은 좌불안석이 따로 없다. 이런 술자리는 소위 기강을 잡는다는 서열문화를 극명하게 드러내 폭력성을 띤다. 대학가에서도 선배들이 신입생을 길들이기 위해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해 종종 문제가 되는 걸 보면 씁쓸해진다.


▲ 사진=tvN 응답하라 1988
▲ 사진=tvN 응답하라 1988

매캐한 취루탄 냄새가 진동하는 80년대 나의 대학생활은 출구 없는 터널을 걷는 불안한 나날이었다. 황량한 시대를 살아가는 황량한 내면. 그 보잘 것 없는 풍경을 살아내면서 닥터 라빅과 깔바도스를 욕망했었다. 벚꽃 흩날리는 봄밤의 정취가 무르익는 4월이 왔다. 닥터 라빅과 깔바도스가 아니어도, 좋은 친구들과 향기로운 동동주 앞에 두고 술좀 마시는 폼이라도 잡고 싶은 봄날이다.

우난순 지방교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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