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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근 이사장 |
그러나 이번 대회가 주는 감동은 단지 국내 최초 개최라는 상징성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오늘날 인류가 마주한 전례 없는 대전환기와 복합적 위기 속에서 문화유산의 보존과 전승을 위한 지구적 나침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절박한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는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파괴되는 문화유산으로 인해 신음하고 있다.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무력 분쟁과 전쟁은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인류의 기억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고 있다. 여기에 지구온난화로 인한 급격한 기후변화는 가뭄, 폭우, 산불, 해수면 상승을 유발하며 자연유산뿐만 아니라 고대 유적의 물리적 기반까지 통째로 흔드는 중이다.
과거에는 유산 보존이 특정 국가나 지역의 문제였다면, 이제는 인류 전체가 공동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구적 생존'의 문제가 됐다. 이러한 위기 국면에서 개막 첫날 채택된 '세계유산에 관한 부산 선언(Busan Declaration on World Heritage)'은 국제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기념비적인 이정표다.
대한민국 정부가 주도하고 위원국들이 머리를 맞댄 이번 '부산 선언'의 핵심 키워드는 바로 '협력(Cooperation)'이다. 기존 세계유산협약이 추구해 온 5대 전략 목표인 신뢰성, 보존, 역량 강화, 소통, 공동체(5C)를 넘어, 마침내 '협력'이라는 여섯 번째 기둥을 추가할 것을 선언한 것이다. 이는 전쟁과 재난, 기후위기라는 복합적 도전 앞에서 국가와 기관, 전문가와 지역공동체, 그리고 미래 세대인 청년까지 모두가 연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공동 책임의 엄중한 선언이기도 하다.
특히 남지은 문화유산회복재단 국제협력실장이 발표한 청년선언문은 의미심장하다.
전세계 수많은 청년 중 33명이 선발된 청년들이 일주일 동안 토론하고 숙의해 결정한 선언문에는 기성세대의 실패와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담겨있다.
이번 회의는 인공지능(AI)을 비롯한 급격한 디지털 환경 변화 속에서 '디지털 유산 관리와 전환'에 대한 책임을 공론화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디지털 기술을 통한 유산의 원형 기록과 보존은 재난이나 전쟁으로 유산이 훼손되더라도 이를 완벽히 복구하고 해석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과학기술을 유산 보존에 올바르게 접목하고, 이를 개발도상국과 공유해 글로벌 유산 격차를 해소하자는 다짐은 우리 인류가 고도의 첨단 문명을 어떻게 올바르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보여준다.
개최지인 부산이라는 도시 자체도 인류에게 깊은 메시지를 던진다. 부산은 한국전쟁 당시 전국의 피란민을 품어내며 대한민국을 지켜낸 평화와 회복의 도시다. 전쟁의 상처를 딛고 눈부신 경제·문화적 번영을 이룩한 부산의 역사는, 위기 속에서도 인류가 어떻게 희망을 복원해 냈는지를 증명하는 살아있는 유산이다. 현재 부산이 추진 중인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유산'의 2030년 세계유산 등재 노력 역시, 단순한 과거의 기록을 넘어 비극의 역사를 평화의 가치로 승화시키려는 거대한 여정이다.
이런 국제적인 흐름 속에서 문화유산회복재단도 그동안 국외로 유출되거나 약탈당한 우리 문화유산의 원상회복을 위해 민간 공공외교의 최전선에서 뛰어왔다. 유산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그 유산에 깃든 민족의 정신과 인류의 기억을 잃는 것과 같다. 전쟁과 기후 위기로 유산이 파괴되는 현 상황은 우리에게 더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한다.
문화유산은 단순히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유물이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 온전하게 전해줘야 할 '미래를 위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한 번 훼손되면 되돌릴 수 없기에, 지금 우리가 보여주는 연대와 실천만이 유산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
부산에서 열린 제48차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 문화의 힘(K-Culture)을 세계에 과시하는 축제의 장을 넘어, 지구적 도전에 맞서는 인류의 지혜를 모으는 엄숙한 공론의 장이 돼야 한다.
이번 대회를 계기로 '부산 선언'의 약속들이 선언적 언어에 그치지 않고, 국제적인 공적개발원조(ODA) 확대, 기후위기 취약국 지원, 생성형 AI 기반 디지털 기술 개발 등 실질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기를 강력히 소망한다. 위기의 시대, 인류가 나아갈 길은 명확하다. 유산이 가진 화합의 힘을 믿고, 지구적 협력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세계 유산을 지켜는 일은 과거를 보존하는 일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다. 부산선언이 약속을 행동으로 바꾸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이상근 문화유산회복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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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제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