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판사가 말하는 빨대사회

  • 오피니언
  • 편집국에서

[편집국에서]판사가 말하는 빨대사회

사회과학부 임병안 차장

  • 승인 2024-05-29 17:50
  • 신문게재 2024-05-30 18면
  • 임병안 기자임병안 기자
임병안
사회과학부 임병안 차장
대전 법조계에서 요즘 화두는 사기입니다. 사실을 감추고 속여 경제적 이득을 얻는 행위를 사기라고 말하죠. 가까이는 물품을 판매할 것처럼 속여 돈만 받아 가로채거나 심각한 병폐로 자리 잡은 보이스피싱이나 전세사기가 대표적인 사례죠. 지난달에 동네서점에 갔다가 대전고등법원 모성준 판사의 '빨대사회'라는 책이 베스트셀러 코너에 진열되어 있어 한 부 구매했습니다. 잘 꽂으면 시원한 음료를 쭉쭉 마실 수 있는 빨대가 표지에 프린트 된 그 책에는 '사기범죄 천국의 도래'라는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판사가 뭐 이런 책을 냈대"라고 생각하며 집어 들게 되더군요. 책을 절반쯤 읽으면서 드는 느낌은 현직 판사가 조만간 사기공화국이 도래할 것임을 사회에 알리고자, 야구로 치자면 직구 같은 문장으로 고발을 하는 것이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모 판사는 자신이 책을 쓴 이유에 대해 직접 이렇게 밝힙니다. "'최근 한국에서 조직적 사기범행이 이토록 창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대한민국 국회가 사기범죄조직에 대한 수사와 재판을 현저하게 곤란하게 함과 동시에 조직적 사기범행의 설계와 기획을 담당하던 수괴들에게 수사와 재판을 온전히 피해갈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부여했기 때문이다'라는 불편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말이다"라고 말이죠. 국회의 최근 형사소송법 개정과 검찰의 수사권한 박탈을 말하는 것이고, 모두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형사사법시스템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붕괴되고 있다고 471페이지에 달하는 책에서 초지일관의 자세로 말하고 있다.



2022년 검찰의 수사권을 완전히 박탈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논의될 때 노정환 당시 대전지검장은 기자회견을 두 번 자청해 "불의를 안전하게 저지르도록 만드는 법안"이라고 일갈했는데, 그 후 2년을 보내고 형사사법시스템 붕괴를 말하는 판사의 책을 다시 마주하면서 "우리가 잘 못 된 길을 가고 있나"라는 반문을 하게 됩니다. 보이스피싱 범죄조직을 봐도, 그들의 조직은 이미 온전한 의미의 중견기업의 조작과 별반 차이가 없고, 범행을 저지를 때 치밀하고도 꼼꼼한 일처리 방식 또한 정상 기업의 그것과 다르지 않으며, 온라인과 국제통신을 통해 국제화되어 불특정 다수의 수많은 피해를 내는데 우리 형사사법시스템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상황입니다.

이런 와중에 대전지법 2-2형사부가 4월 25일 이뤄진 선고문도 주목을 끕니다. 인터넷에서 물품을 판매할 것처럼 속여 돈만 받아 가로채는 수법으로 1억5000만 원 상당의 부당이익을 챙긴 사건의 항소심에서 피고인에게 실형을 선고한 사건입니다. 이례적으로 피해자 47명의 배상신청을 인용하고, 가집행을 허용하고, 항소심의 소송비용도 피고가 부담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제가 이를 이례적이라고 본 것은 사기범죄 피해자들이 신청하는 배상 신청이 법원에서 주로 기각되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며, 원심(1년6개월)을 파기하고 징역 3년을 선고했을 정도로 엄하게 다뤄졌기 때문이다.



판결문을 자세히 읽어보니 재판부가 어떤 이유에서 선고를 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해당 판결문에는 보기 드물게 국내 사기죄 발생추이를 국가통계를 인용해 그래프까지 표시해가며 재판부는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에 사기 범죄 발생이 크게 증가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공지의 사실이다.(중략)사기 범죄의 증가세뿐만 아니라 법원이 사기죄를 가벼운 형으로 처벌하는 데 그치는 재판도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을 위험에 빠뜨린다. (중략)조직적 사기 범행에 가담한 자들을 무겁게 처벌함으로써 국민과 우리 사회 구성원의 재산과 신뢰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매우 높다"라고 말이죠. 이달 취임한 성상헌 대전지검장의 취임사를 찾아보니 검찰 본연의 임무를 강조하며 거론한 척결 범죄 대상으로 첫 번째가 보이스피싱이었고 전세사기, 투자사기 순이었다. 사기범죄를 당하지 않았다고 혼자서 안심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이미 우리 사회에 임계치를 넘어 선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충남통합市 명칭논란 재점화…"지역 정체·상징성 부족"
  2. 대전 한우리·산호·개나리, 수정타운아파트 등 통합 재건축 준비 본격
  3. 대전 유성 엑스포아파트 지구지정 입안제안 신청 '사업 본격화'
  4. <속보>갑천 파크골프장 무단조성 현장에 잔디 식재 정황…고발에도 공사 강행
  5. 대전교육청 종합청렴도 2등급→ 3등급 하락… 충남교육청 4등급
  1. 이재석 신임 금융감독원 대전세종충남지원장 부임
  2. 주택산업연구원 "내년 집값 서울·수도권 상승 유지 및 지방 상승 전환"
  3. 대전세종범죄피해자지원센터, 김치와 쇠고기, 떡 나눔 봉사 실시
  4. 경북도, 올 한해 도로. 철도 일 잘했다
  5. [행복한 대전교육 프로젝트] 대전둔곡초중, 좋은 관계와 습관을 실천하는 인재 육성

헤드라인 뉴스


김태흠-이장우, 충남서 회동… 대전충남 행정통합 방안 논의

김태흠-이장우, 충남서 회동… 대전충남 행정통합 방안 논의

대전·충남 행정통합을 주도해온 김태흠 충남도지사와 이장우 대전시장이 만났다. 양 시도지사는 회동 목적에 대해 최근 순수하게 마련한 대전·충남행정통합 특별법안이 축소될 우려가 있어 법안의 순수한 취지가 유지되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만났다고 밝혔다. 가장 이슈가 된 대전·충남광역시장 출마에 대해선 김 지사는 "지금 중요한 것은 정치적인 부분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불출마 할 수도 있다 라고 한 부분에 대해선 지금도 생각은 같다"라고 말했다. 이장우 시장은 24일 충남도청을 방문, 김태흠 지사를 접견했다. 이 시장은 "김태흠..

정청래 "대전 충남 통합, 法통과 되면 한 달안에도 가능"
정청래 "대전 충남 통합, 法통과 되면 한 달안에도 가능"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24일 대전 충남 통합과 관련해 "충남 대전 통합은 여러 가지 행정 절차가 이미 진행되어 국회에서 법을 통과시키면 빠르면 한 달 안에도 가능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정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대전·충남 통합 및 충청지역 발전 특별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에서 "서울특별시 못지 않은 특별시로 만들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8일 대통령실에서 대전 충남 의원들과 오찬을 가진 자리에서 "내년 지방선거 때 통합단체장을 뽑자"고 제안한 것과 관련해 여당 차원에서 속도전을 다짐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기획] 백마강 물길 위에 다시 피어난 공예의 시간, 부여 규암마을 이야기
[기획] 백마강 물길 위에 다시 피어난 공예의 시간, 부여 규암마을 이야기

백마강을 휘감아 도는 물길 위로 백제대교가 놓여 있다. 그 아래, 수북정과 자온대가 강변을 내려다본다. 자온대는 머리만 살짝 내민 바위 형상이 마치 엿보는 듯하다 하여 '규암(窺岩)'이라는 지명이 붙었다. 이 바위 아래 자리 잡은 규암나루는 조선 후기부터 전라도와 서울을 잇는 금강 수운의 중심지였다. 강경장, 홍산장, 은산장 등 인근 장터의 물자들이 규암 나루를 통해 서울까지 올라갔고, 나루터 주변에는 수많은 상점과 상인들이 오고 가는 번화가였다. 그러나 1968년 백제대교가 개통하며 마을의 운명이 바뀌었다. 생활권이 부여읍으로 바..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크리스마스 분위기 고조시키는 대형 트리와 장식물 크리스마스 분위기 고조시키는 대형 트리와 장식물

  • 6·25 전사자 발굴유해 11위 국립대전현충원에 영면 6·25 전사자 발굴유해 11위 국립대전현충원에 영면

  • ‘동지 팥죽 새알 만들어요’ ‘동지 팥죽 새알 만들어요’

  • 신나는 스케이트 신나는 스케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