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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아침 대전역에서 매표원에게 다짜고짜 말했다. 고택일처럼. "만원 안쪽으로 갈 만한 곳으로 주세요." 매표원이 목적지가 어디냐고 물었다. 나는 살짝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무계획으로 나왔다, 만원 안쪽으로 어디가 있냐. 매표원은 구미나 김천이 있다고 했다. 김천 표를 끊었다. 김천역에 내려 택시기사들에게 어디가 좋냐고 물으니 직지사를 알려줬다. 시내버스도 자주 있고 가깝다고. 빵 두 개를 사서 시내버스 맨 뒤에 앉아 바깥풍경을 구경하며 맛나게 먹었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고? 천국이 따로 없는데. 황악산 아래 자리잡은 직지사는 꽤 넓고 오래된 나무도 많다. 들리는 건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뿐.
산쪽으로 난 오솔길에 '홀로 걷는 길'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한번 가볼까? 초여름의 숲은 쌉싸레한 향기로 가득했다. 얼마쯤 올라갔을까. 헉! 땅을 보고 걸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밟을 뻔 했다. 땅 색깔과 흡사해 구분하기 힘들었다. 살모사였다. 몸통이 제법 굵고 무늬가 영락없었다. 만약에 밟았더라면? 독사가 꼬리를 막 흔들었다. 꺼지라는 얘기다. 기다란 나뭇가지를 주워 건드리는 시늉을 하자 독사가 머리를 세우고 공격자세를 취했다. 얼씨구, 요놈 봐라. 나는 다리가 후들거리는데도 부아가 나서 독사와 기싸움을 했다. 지가 전세 냈나, 비켜주면 나도 암말 안하고 지나갈 텐데. 마침 올라오던 스님이 지팡이로 놈을 치웠다. 휴우!
산에서 내려왔을 땐 두 시가 훌쩍 넘었다. 절 아래 식당에 들어가 산채비빔밥을 주문했다. 먼저 물병 두 개가 나왔다. 하나는 숭늉 같아서 컵에 따라 마셨는데 식혜였다. 시원했다. 단 맛이 깊고 진했다. 목도 마른 터라 연거푸 석 잔을 마셨다. 공장에서 나오는 식혜와는 차원이 달랐다. 주인이 직접 만든 거란다. 산채비빔밥도 훌륭했다. 계란 프라이를 얹은 온갖 나물에 고소한 참기름. 밥 한 공기를 탁 넣고 고추장을 넣어 살살 비볐다. 채소는 삼시세끼 매일 먹어도 왜 안 질릴까. 우거지 된장국도 나무랄 데 없었다. 내가 맛있다고 연발하자 주인 딸이 "부족하면 말씀하세요"라고 명랑하게 말했다. 식당 벽에 '나는 SOLO' 남녀 출연자가 이 집에서 밥을 먹는 장면의 화보가 붙어 있었다. 여기까지 왔다고?
20~30대 한창 나이 땐 친구, 후배들과 몰려다녔는데 지금은 혼자 있는 게 편하고 좋다. 해발 4천m 극한의 땅 희말라야엔 눈표범이 산다. 눈표범은 고독한 사냥꾼이다. 항상 혼자 다닌다. 하이에나처럼 무리짓기를 하지 않는다. 눈표범은 가장 강한 동물이지만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얼핏 나타났다가도 이내 사라진다. 그래서 '고산의 유령'이라고 불린다. 눈표범은 옅은 회색빛을 띠어 신비롭고 우아하다. 몸통만큼 긴 꼬리는 탐스럽고 유연하다. 그 꼬리로 중심을 잡고 험준한 산을 수월하게 다닌다. TV 다큐에서 본 먼 곳을 응시하는 눈표범의 위엄에 찬 눈빛을 잊을 수 없다. 나는 고독한 포식자 눈표범을 추앙한다. 그나저나 그 식혜가 자꾸 생각나는 걸? <지방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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