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만원으로 갈 수 있는 데 하나요

  • 오피니언
  • 우난순의 식탐

[우난순의 식탐] 만원으로 갈 수 있는 데 하나요

  • 승인 2025-06-04 17:45
  • 신문게재 2025-06-05 18면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비빔밥
엄마와 단둘이 사는 고택일은 고등학교 자퇴생이다. 엄마는 검정고시 준비해서 대학 가라고 하지만 택일은 공부가 싫다. 거기다 중고 오토바이를 사서 친구와 타고 가다 사고를 내고 경찰서에 간다. 왕년에 배구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엄마가 달려와 강스파이크로 아들의 싸대기를 때린다. 택일은 가출을 결심하고 버스터미널에 가서 매표원에게 "만원으로 갈 수 있는 데 하나요"라고 말한다. 매표원은 목적지를 대라고 하지만 택일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매표원이 도끼눈을 뜨고 "지금 장난해요"라며 노려본다. 뒤에 줄 서 있던 군인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끼어든다. "그 돈으로 어딜 간다고, 논산 가요 논산." 영화 '시동'의 한 장면이다.

금요일 아침 대전역에서 매표원에게 다짜고짜 말했다. 고택일처럼. "만원 안쪽으로 갈 만한 곳으로 주세요." 매표원이 목적지가 어디냐고 물었다. 나는 살짝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무계획으로 나왔다, 만원 안쪽으로 어디가 있냐. 매표원은 구미나 김천이 있다고 했다. 김천 표를 끊었다. 김천역에 내려 택시기사들에게 어디가 좋냐고 물으니 직지사를 알려줬다. 시내버스도 자주 있고 가깝다고. 빵 두 개를 사서 시내버스 맨 뒤에 앉아 바깥풍경을 구경하며 맛나게 먹었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고? 천국이 따로 없는데. 황악산 아래 자리잡은 직지사는 꽤 넓고 오래된 나무도 많다. 들리는 건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뿐.

산쪽으로 난 오솔길에 '홀로 걷는 길'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한번 가볼까? 초여름의 숲은 쌉싸레한 향기로 가득했다. 얼마쯤 올라갔을까. 헉! 땅을 보고 걸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밟을 뻔 했다. 땅 색깔과 흡사해 구분하기 힘들었다. 살모사였다. 몸통이 제법 굵고 무늬가 영락없었다. 만약에 밟았더라면? 독사가 꼬리를 막 흔들었다. 꺼지라는 얘기다. 기다란 나뭇가지를 주워 건드리는 시늉을 하자 독사가 머리를 세우고 공격자세를 취했다. 얼씨구, 요놈 봐라. 나는 다리가 후들거리는데도 부아가 나서 독사와 기싸움을 했다. 지가 전세 냈나, 비켜주면 나도 암말 안하고 지나갈 텐데. 마침 올라오던 스님이 지팡이로 놈을 치웠다. 휴우!

산에서 내려왔을 땐 두 시가 훌쩍 넘었다. 절 아래 식당에 들어가 산채비빔밥을 주문했다. 먼저 물병 두 개가 나왔다. 하나는 숭늉 같아서 컵에 따라 마셨는데 식혜였다. 시원했다. 단 맛이 깊고 진했다. 목도 마른 터라 연거푸 석 잔을 마셨다. 공장에서 나오는 식혜와는 차원이 달랐다. 주인이 직접 만든 거란다. 산채비빔밥도 훌륭했다. 계란 프라이를 얹은 온갖 나물에 고소한 참기름. 밥 한 공기를 탁 넣고 고추장을 넣어 살살 비볐다. 채소는 삼시세끼 매일 먹어도 왜 안 질릴까. 우거지 된장국도 나무랄 데 없었다. 내가 맛있다고 연발하자 주인 딸이 "부족하면 말씀하세요"라고 명랑하게 말했다. 식당 벽에 '나는 SOLO' 남녀 출연자가 이 집에서 밥을 먹는 장면의 화보가 붙어 있었다. 여기까지 왔다고?

20~30대 한창 나이 땐 친구, 후배들과 몰려다녔는데 지금은 혼자 있는 게 편하고 좋다. 해발 4천m 극한의 땅 희말라야엔 눈표범이 산다. 눈표범은 고독한 사냥꾼이다. 항상 혼자 다닌다. 하이에나처럼 무리짓기를 하지 않는다. 눈표범은 가장 강한 동물이지만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얼핏 나타났다가도 이내 사라진다. 그래서 '고산의 유령'이라고 불린다. 눈표범은 옅은 회색빛을 띠어 신비롭고 우아하다. 몸통만큼 긴 꼬리는 탐스럽고 유연하다. 그 꼬리로 중심을 잡고 험준한 산을 수월하게 다닌다. TV 다큐에서 본 먼 곳을 응시하는 눈표범의 위엄에 찬 눈빛을 잊을 수 없다. 나는 고독한 포식자 눈표범을 추앙한다. 그나저나 그 식혜가 자꾸 생각나는 걸? <지방부장>
우난순 수정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YWCA, 세계환경의 날 기념 캠페인
  2. '신종여성폭력, 선제적으로 대응하라'폭력 추방 합동캠페인과 사랑나눔바자회 '핑크하트데이'
  3. 굿네이버스 '좋은이웃유아기관(나눔인성교육사업)' 나눔 캠페인 29호
  4. 세종중앙공원 '제2맨발길' 공식 개장...새로운 휴식 명소 노크
  5. 이재명 대통령 당선에 지역 교육계 "교육공약 이행돼야"
  1. 천안시, K-컬처박람회서 성인지 모니터링 및 여성친화투어길 홍보
  2. 대전대 대전한방병원서 프랑스 의료인 연수 "한의학 접목한 의료할 것"
  3. 대전보훈병원, 호국보훈의달 입원환자에게 무궁화꽃을 가슴에
  4. "일감 몰아주기 폐해"…2년 만에 파손 대전 서구 스쿨존 안전펜스
  5. 세종시교육청, 5-1생활권 각급학교 개교시기 변경

헤드라인 뉴스


"연내 특별법 통과 목표" 대전·충남 행정통합 협의체 재가동

"연내 특별법 통과 목표" 대전·충남 행정통합 협의체 재가동

대전충남 행정통합 민관협의체(이하 민간협의체)가 '제4차 전체회의'를 개최했다. 대선 이후 양 시·도 행정통합 추진방안과 공론화 전략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하기 위함이다. 5일 충남도청 대회의실에서 진행된 이번 회의는 대전·충남 행정통합의 당위성과 전략적 중요성을 재확인하고 통합 추진에 대한 공동의 의지를 다졌다. 그동안 민관협의체는 '대한민국 경제과학 수도, 대전충남특별시'라는 비전 아래 인구 전국 3위, 지역내총생산 3위, 수출 2위의 경쟁력을 갖춘 특별시 조성을 목표로 통합의 토대를 꾸준히 마련해 왔다. 앞서 3월 '제..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38. 대전 유성구 노은3동 일대 카페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38. 대전 유성구 노은3동 일대 카페

자영업으로 제2의 인생에 도전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정년퇴직을 앞두거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가게를 차리는 소상공인의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자영업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나 메뉴 등을 주제로 해야 성공한다는 법칙이 있다. 무엇이든 한 가지에 몰두해 질리도록 파악하고 있어야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때문이다. 자영업은 포화상태인 레드오션으로 불린다. 그러나 위치와 입지 등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아이템을 선정하면 성공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에 중도일보는 자영업 시작의 첫 단추를 올바르게 끼울 수 있도록 대전의 주요 상권..

‘충청 3선 강훈식 국회의원’ 이재명 대통령 초대 비서실장 임명
‘충청 3선 강훈식 국회의원’ 이재명 대통령 초대 비서실장 임명

이재명 대통령 초대 비서실장에 충남 아산 출생인 더불어민주당 강훈식 국회의원(3선·충남 아산시을)이 임명됐다. 이 대통령은 4일 오후 대통령실 브리핑룸에서 국무총리 후보자와 대통령 비서실장 등 새 정부 첫번째 인사를 직접 발표하고 인선 배경을 설명했다. 국무총리 후보자는 4선의 김민석(64년생) 국회의원, 국가정보원장 후보자로는 이종석(58년생) 전 통일부 장관이 지명됐다. 대통령 비서실장은 강훈식(73년생) 국회의원, 안보실장은 위성락(54년생) 국회의원(비례), 경호처장은 황인권(63년생) 전 육군 대장, 대변인은 강유정(75년..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공공기관 시설물에 광고 전단지 안됩니다’ ‘공공기관 시설물에 광고 전단지 안됩니다’

  • 대통령 당선 현수막 대통령 당선 현수막

  • ‘제21대 대선 끝’…철거되는 벽보 ‘제21대 대선 끝’…철거되는 벽보

  • 제21대 대선 개표 시작 제21대 대선 개표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