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시(시장 최원철)와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소장 황인호)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의 1~4호분 발굴 재조사 성과를 17일 공개했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백제가 공주에 도읍한 475년부터 538년까지 재위한 웅진기 왕들의 묘역으로, 이번에 조사한 1~4호분은 무령왕릉 묘역과 구분되어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들 묘역은 일제강점기 때 모두 도굴된 상태로 한 차례 조사가 있었으며, 지난해 7월부터 재조사가 진행됐다.
연구소에 따르면 2호분에서 출토된 어금니 2점이 법의학 분석 결과 10대 중후반의 것으로 밝혀지면서, 2호분 주인이 15세에 세상을 떠난 삼근왕(23대, 477~479)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로써 왕릉왕 1~4호분에 묻힌 이들도 개로왕의 직계인 문주왕(22대, 웅진 천도)과 삼근왕을 비롯해 혈연관계에 있는 왕족들로 추정된다.
연구소 측은 "2호분에서 화려한 공예품들이 발견됐는데 그 중 청색 유리옥이 달린 금귀걸이는 한성기와 웅진기 후반에 제작된 왕비 귀걸이 중간 형태로서 무덤 주인이 웅진 초기에 재위했다는 사실을, 또 당시에도 백제 왕실이 높은 수준의 금세공기술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이어 "은에 금을 도금한 줄무늬 반지는 동일 형태가 경주 황남대총 북분에도 있는 것으로 보아 웅진 초기 백제와 신라가 긴밀한 관계였음을 보여주고, 철에 은을 씌워 장식한 오각형 형태의 칼 손잡이 고리 장식은 나주와 논산에서 발견돼 당시 백제가 지방 수장층에게 하사한 것으로 해석 가능하다"고 밝혔다.
아울러 1~4호분 묘역에서 출토된 여러 종류의 유리 옥 1000여 점 중, 황색과 녹색 구슬에 사용된 납 성분은 무령왕릉과 동일하게 태국산으로 분석됐는데, 이는 웅진 도읍초기에도 동남아시아를 아우르는 교역망이 운영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연구소는 한성기에서 웅진기로 이어지는 백제 왕실의 돌방무덤 구조와 묘역 조성 과정도 확인했다. 묘역은 사전 계획에 따라 경사면을 깎아내서 완만하게 조정한 다음, 가장 동쪽에 위치한 1호분부터 4호분 순서로 조성된다. 돌방은 지하에 만들어지며 천장돌을 1매만 사용하는 궁륭식 구조이다. 내부 벽면에는 모두 석회를 발랐고, 바닥에는 30㎝ 두께로 강 자갈을 채워 넣었다.
이 같은 조사 성과는 그간 정치적 혼란기로만 인식됐던 백제 웅진기 전반에도 내부 정치 시스템과 대외 교역이 잘 유지됐음을 보여준다. 이를 발판으로 무령왕은 '다시 강국이 되었음(更爲强國)'을 선언할 수 있었고, 성왕은 사비로 천도하여 한층 성숙한 문화를 완성한 것이다.
최원철 시장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백제사 연구의 가장 중요한 유적"이라며, "국가유산청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와 함께 지속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왕릉원 내 잊혀진 고분들을 하나씩 찾아내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및 백제왕도 핵심 유적으로서의 진정성 및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할 것"이라고 밝혔다. 공주=고중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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