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사 산책]⑧『환단고기』 위서론의 허점 : '근대 용어' 프레임의 실체를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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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사 산책]⑧『환단고기』 위서론의 허점 : '근대 용어' 프레임의 실체를 밝히다

안병우 충북대 교수

  • 승인 2026-03-09 13:39
  • 제2뉴스팀제2뉴스팀


언어는 시대를 담는 그릇인 동시에, 과거의 진실을 탐색하는 정교한 지도와 같다. 하지만 우리가 그 지도를 읽는 방식이 '현재의 고정관념'에만 매몰되어 있다면, 정작 그 속에 담긴 본질적인 가치를 놓치기 쉽다. 특히 우리 상고사의 보고(寶庫)라 불리는 『환단고기』를 둘러싼 진위 논쟁에서 '용어'의 문제는 가장 날 선 공방이 오가는 지점이다.

"『환단고기』는 믿을 수 없는 조작된 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드는 근거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근대용어의 사용문제이다. 『환단고기』에는 근대이전에 사용되지 않았던 헌법, 자유, 평등, 문화, 세계, 국가, 산업, 인류 등이 나오므로 『환단고기』는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책이라는 것이다. 지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이러한 주장에 쉽게 동조한다. 그런데 이러한 용어들이 정말로 근대용어일까? 환단고기에 근대용어가 사용되었다는 주장은 과연 사실일까?

근대용어란 서구문물이 동양으로 들어오면서 전통 동양사회에서는 없던 개념들을 한자어로 번역하면서 생겨난 새로운 말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서구문물이 동양으로 들어온 것은 메이지시대 일본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근대용어는 그 무렵에 주로 생겨났는데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같은 일본의 지식인들의 노력의 산물로 알려져 있다.

당시에 서구의 언어를 한자문화권의 언어로 바꾸는 것은 큰 숙제이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Philosophy라는 말이 처음 들어왔을 때 동양의 학문세계에서는 이에 합당한 말이 없었다. '지혜(sophia)를 사랑하다(phil-)'라는 뜻을 담은 이 말은 나중에 철학으로 번역되었는데, 지혜로운 사람을 뜻하는 철인이라는 말에 착안하여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학문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철학'은 이전에는 사용하지 않던 완전히 새로운 말이다. 신조어였던 것이다.

이러한 신조어의 또 다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과학科學'이다. '과학'으로 번역된 'science'는 '앎', '지식'이란 뜻의 라틴어 'scientia'에서 유래했다. 처음에는 '대학'에 나오는 '격물치지'를 따서 '격물'로 번역되었으나 결국 과학科學으로 굳어졌는데 서양의 학문은 동양의 학문에 비하여 세분화된(科) 것이 특징이라는 이유에서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과학이라는 말은 '세분화된 학문'이란 뜻일 뿐 결코 '앎'이라고 하는 원래의 뜻을 담고 있지 않다. 이처럼 '철학'이나 '과학' 같은 말은 완전한 신조어였다는 면에서 순수 근대용어라고 할 수 있다. '학술', '기술', '예술', '개념', '사회', '주관', '객관', '귀납', '연역', '명제' 등 오늘날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수많은 말들이 이때 만들어진 근대용어들이다.

그런데 모든 서구의 어휘에 대하여 새롭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 사용한 방법이 원래 쓰던 말을 빌려와서 서구 용어의 번역어로 쓰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종교'라는 말이 그렇다. '종교'는 'religion'을 번역한 것인데, 이것은 원래 영명연수永明延壽(904~975) 선사가 『종경록』에서 말했던 '종교지지宗敎之地'에서 따온 말이었다. '재결합'이라는 뜻의 라틴어 'religio'에서 유래한 'religion'은 인간이 원죄를 지어서 신과 멀어지게 되었으므로 예수를 믿고 신과 인간이 다시 재결합을 해야 구원의 길이 열린다는 의미의 말이었다.

이처럼 religion은 기독교에만 해당 되는 개념이었지만 불교를 말하던 종교라는 말로 번역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기독교, 불교, 유교 등과 같은 종교의 유개념으로 정착되게 되었던 것이다.

정리하면 '종교'는 기존에 있던 언어였지만 'religion'의 번역어로 새롭게 사용됨으로써 뜻이 새롭게 바뀐 근대용어가 된 것이다. 즉 근대용어라고는 하지만 과거에 전혀 없던 말이 아니고 원래 있던 말을 빌려와서 서구용어를 번역한 말로 쓰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자연'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영어의 'nature'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자연'을 끌어다 쓰면서 오늘날처럼 산이나 강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말로 보편적으로 쓰이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자연'은 글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뜻이었다. 『노자도덕경』 25장에 보면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으며,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예는 너무도 많다. 헌법, 문화, 세계, 자유, 평등, 산업, 개화 등 『환단고기』에 사용된 이런 말들은 순수 근대용어가 아니라 과거부터 많이 써오던 말이었다. 다만 근대용어화하면서 뜻이 바뀐 채 사용됨에 따라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근대용어인 줄로 착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國語』 <晉語>편에서 '賞善罰姦(상선벌간) 國之憲法也(국지헌법야)'(선한 행동에 상을 주고 간사한 행동에 벌을 주는 것은 나라의 법이다)라는 용례에서 볼 수 있듯이 '헌법憲法'이란 말은 오늘날의 헌법의 개념과는 다른 뜻으로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던 것이다.

'자유自由'라는 말도 영어의 liberty, freedom의 번역어로 처음 생겨난 말인 줄 알고 있으나 사실은 원래부터 있던 말이었다. '스스로 말미암다'라는 의미를 가진 '자유'는 '제멋대로 하다'라는 뜻도 있지만 원래 '자아유지自我由之'의 줄임말로 '나로부터 말미암는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자유'는 원래부터 '내 행동의 결과'라는 의미가 담겨있었던 것이다. 자유자재自由自在(스스로 말미암고 스스로 존재한다)라는 말은 『景德傳燈錄』을 비롯하여 불교경전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평등平等'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금강경』에 보면 '是法平等(시법평등) 無有高下(무유고하)'(이 법은 평등하니 높고 낮음이 없다)라고 그 용례가 나온다.

'문화'는 서구의 'culture'를 번역하면서 처음 생긴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이문교화以文敎化'의 줄임말로 '글로써 사람을 다스리고 교화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설원說苑』의 <지무指武>편에는 '聖人之治天下也(성인지치천하야) 先文德而後武力(선문덕이후무력) 凡武之興爲不服也(범무지흥위불복야) 文化不改然後可誅(문화불개연후가주)'(성인이 천하를 다스림에 문덕을 먼저하고 무력은 나중에 쓴다. 무릇 무력이 흥하면 복종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글로써 교화를 하고 고쳐지지 않으면 연후에 벨 수 있다)라고 문화의 용례가 나온다.

『단군세기』에 보면 '勸農桑(권농상)하시며 設寮興學(설료흥학)하시니 文化大進(문화대진)하야 聲聞日彰(성문일창)하니라'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 의미는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하시고 학교를 세우고 배움을 일으키시니 글로써 교화함이 크게 발전하여 그 명성이 나날이 퍼져나갔다.'라는 의미이다. 여기 나오는 문화를 위서론자들은 오늘날의 문화의 개념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조금만 살펴보면 그것은 그저 의도된 해석일 뿐 원뜻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환단고기』에는 인류, 진화, 세계, 문명 등과 같은 말들이 나오지만 이들도 메이지 시대에 만들어진 신조어로서의 순수 근대용어가 아니고 고전에 용례가 모두 나오는 언어들이다. 따라서 '『환단고기』에 근대용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환단고기』는 위서이다'라는 주장은 결코 사실이 아닌 것이다.

결국 특정 단어의 '외형'만을 근거로 삼아 수천 년 역사의 기록을 단칼에 '위서'로 치부하는 것은, 학문적 엄밀함을 가장한 피상적인 단견(短見)에 불과하다. 언어는 시대에 따라 그릇에 담기는 내용물이 바뀔 뿐, 그 그릇 자체의 역사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유구할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근대적 의미로 덧칠해진 '단어의 오늘'이 아니라, 그 용어들이 고전 속에서 어떤 맥락으로 살아 숨 쉬고 있었는지에 대한 '어원의 어제'이다. 따라서 '근대 용어'라는 빈약한 논리로 우리 역사의 가능성을 가두려는 시도는 이제 학술적 설득력을 잃었으며, 보다 본질적이고 입체적인 안목으로 우리 기록의 가치를 재검토해야 마땅하다.

환단고기 술어의 고전 용례
환단고기 술어의 고전 용례 (출처 :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안병우 충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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