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신화읽기] 제9장-학고개와 무덤에서 날아간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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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서 신화읽기] 제9장-학고개와 무덤에서 날아간 학

한소민/배재대 강사, 지역문화스토리텔링연구소 소장

  • 승인 2026-04-08 15:00
  • 수정 2026-04-09 13:30
  • 신문게재 2026-04-09 8면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대전 학고개 전설은 신분제 사회에서 억울하게 죽은 종의 한을 풀기 위해 지관이 된 아들이 풍수지리를 이용해 상전의 가문을 몰락시킨 복수와 정의의 이야기입니다. 무덤에서 학이 날아가며 명당의 기운이 소멸했다는 설정은 법과 제도가 권력자의 편이었던 시대에 민초들이 자연의 섭리를 통해 현실의 불의를 바로잡고자 했던 열망을 상징합니다. 이 설화는 타인의 눈물 위에 세워진 가문은 영원할 수 없으며, 진정한 명당은 지리적 조건뿐만 아니라 인간의 덕망과 도덕적 정당성이 갖춰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교훈을 전합니다.

학고개
이미지=구글 제미나이 활용
대전시 중구 옥계동에서 동구 이사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인 학고개에는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전설 하나가 있습니다. 신분제라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숨죽여 살아야 했던 민초들의 한과 그 한을 풀어내기 위해 발현된 자연의 힘, 풍수(風水)가 어우러진 이야기지요.

옛날 이사동의 어느 양반집에 한 종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지요. 아들은 주인집 아이에게 늘 구박을 받고는 그 설움을 부모에게 쏟아내며 종살이를 그만두라고 성화를 부렸습니다. 아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종은 결국 양반집을 떠나 진산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인삼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장사가 잘 되어 재산이 어느 정도 모이게 되자 종은 양반 신분을 사서 옛 상전 집을 찾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상전은 예전의 종이 양반이 되었다고 거드름을 피우며 소란을 떠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다른 종들을 시켜 집 밖으로 내쫓고 매질하게 했지요. 그러던 중 너무 심하게 맞은 종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게 되고 맙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억울한 한을 풀기 위해 금강산으로 들어가 풍수를 배웁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지관이 된 그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옛 상전을 찾아갔지요. 뛰어난 지관 행세를 하며 '조상의 무덤을 옮기면 엄청난 부자가 될 것'이라는 감언이설로 파묘하게 합니다. 무덤을 파헤치는 그 순간, 무덤 속에서 학 한 마리가 솟구쳐 오르더니 고개 너머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명당의 정기를 상징하는 학이 떠나가자 기세등등하던 양반집은 순식간에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지요. 이후 사람들은 학이 나와 날아간 고개를 학고개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이처럼 종이 지관이 되어 돌아와 상전의 집을 망하게 한다는 '풍수보복' 설화는 대전뿐 아니라 다른 여러 지역에서도 전해집니다. 안산 매실골 전설이 대표적이지요. 매실리에 사는 설총 후손은 종의 어린 아들이 말썽을 피우자 대신 그 아비를 매질하게 됩니다. 그런데 매를 맞던 종이 죽게 되고, 이후 쫓겨난 종의 가족은 강원도 산골로 들어가 살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지관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종의 아들은 더 좋은 묫자리를 봐준다며 설씨 선조가 있는 쥐 산을 앞의 고양이 산과 이어놓고 결국 그 집안을 몰락으로 이끌었지요.

무덤 속에서 학이 나오는 바람에 명당의 기운이 없어졌다는 서사는 경북 안동의 하이마 전설과 강원 인제군의 학칠령 전설에서도 나타납니다. 묫자리를 파헤치는 순간 학이 날아가고, 그와 함께 땅의 정기가 사라진다는 설정이 공통적으로 들어있지요. 하이마와 학칠령 모두 학이 날아 갔다는데서 비롯된 지명입니다.

학고개-종합
대전 옥계동에서 이사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인 학고개에 얽힌 전설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사진 왼쪽부터>옥계동에서 올려다본 학고개, 이사동에서 내려다본 학고개 사진=한소민
이 설화들에는 공통적으로 억울한 죽음과 복수, 그리고 풍수와 학이 등장합니다. 특히 '종의 복수'라는 모티프는 민중 설화에서 강력한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내는 장치였지요. 신분제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법과 제도는 언제나 권력자의 편이었기에, 이를 뒤집을 수 없었던 민초들은 자연의 법칙인 풍수에 기대어 현실에서 불가능했던 정의가 땅의 기운을 통해 실현되기를 바랐던 것이지요.

선비의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학은 명당설화 속에서는 땅의 정기이자 도덕적 정당성을 상징합니다. 무덤 속에서 학이 날아갔다는 것은 그 땅이 품고 있던 생명력과 기운이 거두어졌음을 뜻하는 것이겠지요. 명당은 단순히 지리적으로 좋은 위치에 자리했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땅에 묻힌 자의 삶과 후손이 쌓아온 덕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명당의 기운을 품을 수 있을테지요.

법은 권력자의 편일지 모르나, 땅과 하늘의 이치는 그렇지 않다는 믿음이 이 설화들이 전하는 그리고 바라는 메시지 일지도 모릅니다. 타인의 눈물과 억울한 죽음 위에 세워진 가문은 결코 유지될 수 없으며, 그러한 자들에게 명당은 더 이상 명당이 될 수 없다는 사실. 그저 단순한 옛 이야기로만 흘려 들었던 이사동 학고개 전설에는 그런 민초들의 경고와 소망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한소민/배재대 강사, 지역문화스토리텔링연구소 소장

한소민-최종
한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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