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칼럼] 평화의 척도, 고대 페르시아의 수평적 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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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칼럼] 평화의 척도, 고대 페르시아의 수평적 표준

이승미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소재물성측정그룹 책임연구원

  • 승인 2026-04-23 16:51
  • 신문게재 2026-04-24 18면
  • 임효인 기자임효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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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미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소재물성측정그룹 책임연구원
페르시아. 포성과 메마른 모래바람에 둘러싸인 중동은 오늘날 우리에게 다소 거칠고 황량한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그러나 역사의 지층을 한 꺼풀만 벗겨내면 놀랍도록 정교한 표준 제국이 드러난다. 고대 이집트의 로얄 큐빗이 파라오의 팔뚝과 손바닥을 기준 삼은 수직적 위계의 상징이라면, 2500여 년 전 페르시아가 세운 표준은 낯선 이들이 서로를 믿게 하고 문명을 공유하게 만든 수평적 인프라였다.

페르시아 표준의 정수는 화려한 궁전이 아니라 어둡고 축축한 지하 수로 카나트(Qanat)에 숨어 있다. 비 한 방울 귀한 사막에서 물은 곧 권력이자 생명이다. 고산지대의 지하수를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마을까지 식수를 끌어오기 위해 그들은 땅 밑을 파고 들어갔다. 놀라운 것은 그 정밀함이다. 유속이 너무 빠르면 수로가 깎여 무너지고, 너무 느리면 고여서 썩는다. 물을 길어 올릴 펌프가 없던 시절이니 오직 중력과 경사도에 의존한 물길이었다. 페르시아의 기술자들은 1km당 고작 1m 내외, 즉 0.1%라는 기적 같은 경사도를 유지하며 수로를 뚫었다. 그들은 오직 등불의 정렬과 물그릇의 수평에 의지해 암흑 속에서 이 정밀함을 사수했다. 오늘날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에서 나노미터의 오차를 다투는 나의 동료들이 그러하듯, 그들에게도 측정은 타협할 수 없는 생존의 마지막 보루였다. 0.1%의 오차를 지켜낸 그 집요함이 없었다면 사막의 도시는 진작에 모래바람 속에 박제된 유적이 됐을지도 모른다.

지상에는 제국의 도로를 따라 파라상(Parasang)이라는 길이의 단위가 있었다. 약 5.6㎞에 해당하는 이 단위는 '보통의 성인이 한 시간 동안 걷는 거리'를 기준으로 한다. 페르시아의 위대한 황제 다리우스 1세는 약 2700㎞에 달하는 왕도를 닦고 1파라상마다 이정표를 세웠다. 이것은 혁명이었다. '조금 더 가면 되겠지'는 주관적 짐작이 '앞으로 5파라상 남았다'는 객관적인 숫자로 치환되는 순간, 제국은 비로소 예측 가능한 사회로 진입했다. 전령은 자신의 체력을 안배하며 다음 역참을 꿈꿀 수 있게 되었고, 상인은 물류비용을 계산하며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 표준은 이처럼 막연한 불안을 구체적인 확신으로 바꾸는 마법이다. 여기에 표준화된 고순도 금화 다릭(Daric)까지 가세하면 고대 페르시아 제국에서 신뢰의 지도는 완성된다. 다릭은 단순한 화폐를 넘어 제국 어디서나 통용되는 가치의 눈금이었고, 이 공통의 언어를 공유함으로써 페르시아는 서로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오직 교역과 공존에만 집중하는 거대한 경제 공동체가 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다리우스 1세가 설계한 고도의 표준 시스템은 시간이 지나면서 소수점 아래의 진실을 가벼이 여긴 이들의 태만 속에 서서히 마모됐다. 0.1%의 경사를 무시하기 시작하자 물길은 막혔고, 다릭의 귀퉁이를 조금씩 깎아내기 시작했을 때 제국의 신용은 파산했다. 우리는 흔히 표준을 숨 막히는 규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표준은 문명을 지탱하는 기초 지지대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1초, 1kg, 1m라는 단위 뒤에는 찰나의 오차조차 허용하지 않으려는 측정 과학자들의 고집스러운 정직함이 깃들어 있다. 역설적이지만 때로는 딱딱한 척도와 잣대야말로 세상을 가장 부드럽고 안전하게 이어주는 실천적 정의가 된다.

측정은 발전하고 단위는 진화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2500여 년 전 어두운 지하 카나트의 수평을 맞추던 기술자의 간절함은 오늘날 측정표준 과학자들의 엄격한 정직함과 맞닿아 있다. 측정은 서로를 의심하지 않아도 될 공정한 토대를 다진다. 이 합리적 질서 안에서 힘의 논리는 숫자의 정의로 대치된다. 표준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합의할 수 있는 유일한 공용어이자 강자와 약자를 같은 눈금 위에 세우는 공정의 저울이기 때문이다. 이 보이지 않는 질서가 단단할수록 사회는 더 높은 신뢰의 탑을 쌓는다. 포화가 일순간에 삶과 죽음의 경계를 긋는다면 표준은 영속적인 공존과 평화의 지평을 넓힌다. 평화란 서로의 척도가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는 평범한 일상의 측정에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승미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소재물성측정그룹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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