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신화 읽기] 제18장-머들령, 경계를 넘는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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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서 신화 읽기] 제18장-머들령, 경계를 넘는 고개

한소민/배재대 강사, 지역문화스토리텔링연구소 소장

  • 승인 2026-06-30 09:10
  • 수정 2026-07-03 16:04
  • 신문게재 2026-07-01 8면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고개는 단순한 통로를 넘어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경계이자 안녕을 기원하던 공간으로, 길목의 수호신인 헤르메스 신화처럼 여행자와 상인 등 다양한 존재들이 교차하며 삶의 안녕을 빌던 문턱이었습니다.

정훈 시인의 시 '머들령'은 험난한 고갯길을 넘던 개인의 기억을 투영하여, 식민지라는 고난의 세월을 지나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고자 했던 우리 민족의 역사적 의지와 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늘날 물리적인 고개는 터널과 도로로 대체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삶의 도처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선택의 경계를 온 힘을 다해 넘으며 저 너머에 기다리는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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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들령에 세워진 머들령 시비 사진=한소민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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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들령 고갯길 사진=한소민 소장
오로지 두 발로 걸어 다녀야했던 옛사람들에게 고개는 그냥 단순한 길만은 아니었습니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통로이자 익숙한 공간에서 낯선 세계로 들어서는 문턱이었지요. 땀 흘리며 올라가야했던 고개는 저 너머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하는 경계가 되었기에 사람들은 그 길목에 서낭당을 세우거나 돌을 얹으며 떠나고 돌아오는 여정의 평안을 기원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길목과 경계를 지키는 신이 있었습니다. 바로 신들의 전령사 헤르메스이지요. 그의 이름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길목에 세워 경계를 표시하며 신의 가호를 빌던 돌기둥인 '헤르마(Herma)'에서 유래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고갯마루에 서낭당을 만들거나 돌을 쌓아 안전을 빌던 풍습과도 닮아있지요. 헤르메스는 이승과 저승, 신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자유롭게 오가는 존재였습니다.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메신저로서 날개 달린 모자 페타소스를 쓰고 날개 달린 신발을 신은 채 어떤 장벽도 구애받지 않고 빠르게 이동하며 저승이나 그 어느 곳라도 자유롭게 넘나드는 길잡이였습니다. 그는 위험한 길목에서 여행객들을 보호하며 안전하게 이끌어 주기도 하고, 상업 거래를 번창시키는 여행자와 상인의 수호신이었습니다. 동시에 도둑의 은밀함을 대변하는 이중적인 역할도 했지요.

우리 지역에서는 만인산 자락의 머들령에 이러한 경계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말 한 필이 겨우 지나갈 만큼 좁고 험한 길'이라는 마달령(馬達嶺)에서 유래했다는 이 고개는 신라와 맞닿은 접경지였기에 백제 군사들이 말을 타고 오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이후 금산과 충청 내륙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이 되었지만, 고개가 험한 탓에 도적이 자주 출몰해서 혼자서는 도저히 넘어갈 수 없었다지요. 길손들이 주막에 모여 무리를 지어 움직였고 서낭당에 돌을 얹으며 무사히 고개를 넘어가기를 기원했다는 머들령은 현실의 위협과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경외심이 함께 머물던 고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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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산 휴게소에 있는 머들령 시비. 사진=한소민 소장
이 머들령의 정취를 노래한 시가 정훈(1911~1992)시인의 「머들령」입니다.

요강원을 지나 머들령 / 옛날 이 길로 원님이 내리고 / 등짐장사 쉬어 넘고 / 도적이 목 지키던 곳 / 분홍 두루막에 남빛 돌띠 두르고 / 할아버지와 이 재를 넘었다 / 뻐꾸기 자꾸 울던 날 / 감장 개명화에 발이 부르트고 / 파랑 갑사댕기 / 손에 감고 울었더니 / 흘러간 서른해 / 유월 하늘에 슬픔이 어린다 -정훈, 머들령 전문

시인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머들령을 넘었던 아득한 기억을 떠올립니다. 멀고 험한 길에 발이 부르터 울면서도 아이는 끝내 고개를 넘어섰지요. 서른 해가 지난 뒤 다시 돌아본 머들령은 단순한 공간 이동의 기억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이전의 자신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성장의 경험이었을 테지요. 1949년에 발표된 시이기에 '흘러간 서른 해'는 개인의 회상을 넘어 우리 민족이 지나온 고난의 세월을 대변하기도 합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쳐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시기이기에, 머들령은 단순한 고개가 아니라 식민지 시대를 넘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려는 역사적 경계로도 읽힙니다.

흥미롭게도 시에 등장하는 원님과 등짐장사와 도적은 헤르메스 신화와 맞닿습니다. 헤르메스는 신들의 전령사이자 상인과 여행자의 수호신이며, 도둑의 신이기도 했으니까요. 신화 속 헤르메스가 선과 악을 구분하기보다 경계를 오가는 모든 존재를 품었듯이 머들령 역시 그런 공간이었습니다. 가마를 타고 넘던 원님도, 생계를 위해 봇짐을 진 장사꾼도, 바위 틈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던 도적도 이 험준한 고갯길 위에서는 모두가 나그네였습니다. 각자 자신을 지켜줄 신의 손길을 구하며 저마다 가파른 삶의 문턱을 넘고 있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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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들령 고개 아래에 있는 동구 삼괴동 마달촌. 검은 지붕이 예전 나그네들이 모여들던 주막이었다. 마을 어르신의 증언에 의하면 여기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머들령에 올랐다고 한다. 사진=한소민 소장
이제 터널과 도로가 놓여 대전과 금산을 편히 오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험준했던 머들령은 더는 넘지 않아도 되는 길이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삶 속에서 수많은 고개를 만납니다. 그리고 선택의 순간마다 마주하는 경계는 우리를 또다른 곳으로 이끌지요. 그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주어진 고개를 두려워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넘어가는 일. 그리고 그 너머에서 만날 새로운 시간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일. 오직 그것만 알 뿐이지요.

한소민/배재대 강사, 지역문화스토리텔링연구소 소장

한소민-최종
한소민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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