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칼럼] AI 시대, 다시 묻는 측정의 가치

  • 오피니언
  • 사이언스칼럼

[사이언스 칼럼] AI 시대, 다시 묻는 측정의 가치

이승미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소재물성측정그룹 책임연구원

  • 승인 2026-09-10 17:38
  • 신문게재 2026-09-11 18면
  • 임병안 기자임병안 기자
[사진] KRISS 이승미 책임연구원 (1)
이승미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한 의도로 포장되어 있다." 18세기 영국의 문인 새뮤얼 존슨이 남긴 이 경구는 기술과 제도가 고도로 발전한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인간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정책을 설계하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왔다. 그러나 역사는 선한 의도가 반드시 선한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사례가 '코브라 효과'다. 인도 델리에서 식민지 정부는 맹독을 가진 코브라의 피해를 줄이고자 죽은 코브라를 가져오는 주민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독사를 없애 시민의 안전을 지키겠다는 의도는 명백히 선했다. 하지만 일부 주민은 보상금을 얻기 위해 코브라를 직접 사육하기 시작했고, 이후 정책이 폐지되자 방생된 코브라들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잘못된 측정 지표는 선한 의도를 쉽게 배반한다. 측정은 단순히 숫자를 기록하는 행위가 아니라, 무엇을 측정해야 하는지 정의하고 그 지표가 본질을 제대로 반영하는지 끊임없이 검증하는 과정이다.

오늘날 우리는 코브라 현상의 역설을 인공지능(AI)의 발전 속에서 다시 마주하고 있다. 인간의 반복 노동을 줄이고 효율화하겠다는 AI의 출발점은 지극히 선하며 긍정적이다. 생성형 AI는 인간의 언어로 자연스럽게 답변하고 방대한 정보를 분석하면서 일상 생활부터 산업 현장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AI가 제시하는 결과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인공지능은 인간처럼 의도와 책임을 이해하는 존재가 아니라 학습 데이터와 알고리즘에 기반해 결과를 생성하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데이터의 품질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거나 편향된 데이터라면 AI는 아무런 악의 없이도 잘못된 판단을 만들어 낸다. 흔히 발견되는 생성형 AI의 환각 현상 역시 이러한 한계를 보여준다.

따라서 AI가 만들어 내는 모든 결과는 무조건적인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검증의 대상이다. 알고리즘이 제시하는 숫자와 제안은 독립적인 평가 기준과 객관적인 측정 체계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측정할 수 없으면 관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측정과학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측정과학에서 불확도(uncertainty)는 측정의 한계를 숨기는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그 한계를 투명하게 드러내 신뢰성을 높이는 과학적 방법이다. 측정의 본질이 오차 없는 완벽이 아니라 결과의 신뢰 수준을 투명하게 규정하는 데 있듯, AI 시대의 측정 역시 알고리즘이 내놓는 숫자를 맹목적으로 믿는 대신 모델의 한계와 데이터의 신뢰 수준을 명확히 규정하는 일이어야 한다. 신뢰할 수 있는 인공지능을 위해서는 더 많은 데이터와 더 복잡한 알고리즘뿐 아니라, 데이터 품질을 확인하고 결과의 신뢰 수준을 평가할 수 있는 공통의 기준과 표준이 필요하다.

필자가 근무하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에서도 신뢰의 기반을 만드는 연구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1초와 1미터라는 기준 역시 자연에서 그대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비교와 검증을 거쳐 인류가 합의한 표준이다. 측정표준은 화려한 기술처럼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과학과 산업 그리고 사회적 신뢰를 떠받치는 가장 근본적인 기반이 된다. 물리 세계의 표준이 산업 혁명의 기반이었듯 측정과학이 제공하는 검증 체계는 AI가 안전하게 작동하도록 돕는 필수적인 사회적 안전망이 될 수 있다. 기술의 한계와 불확도를 투명하게 제시할 수 있을 때, AI는 비로소 인간을 위한 더욱 강력한 도구가 될 것이다.

선한 의도는 모든 변화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그 의도를 좋은 결과로 완성하는 것은 냉정한 검증의 과정이다. 기후 위기 대응부터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만드는 모든 시스템에는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화려한 기술과 거대한 약속이 넘쳐나는 시대일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결과를 다시 측정하고 확인하는 과학적 태도다. 기술의 거대한 약속에 휩쓸리지 않고 그 이면의 한계를 냉정하게 묻는 과학적 태도, 이것이 바로 AI 시대에 우리가 다시 측정의 가치를 물어야 하는 이유다. /이승미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이번엔 대동교… 트램 공사로 15일부터 왕복 2차로 축소
  2. 국립한밭대 연구자 11명, 세계 상위 2% 과학자 선정
  3. 2030년 완성기 맞는 세종시… 읍면동 활력 도모 방안은
  4. 천안지역 택시 운수종사자 조합, 택시통합·행복콜 폐지 성토...'사회적 합의 우선'
  5. 대전 배추값은 낮아졌지만 속재료는 인상... 김장철 앞 부담 늘어날까
  1. 허태정號 기조실장 '믿을 맨' 오나 친정체제 강화
  2. 청주 원도심 다시 잇는다… 공간·상권·생활에 새 활력 대혁신
  3. 서산 온가족축제, 추억의 교복부터 맷돌커피까지, 10월 31일 '레트로 여행' 떠난다
  4. 대전 태평동5구역 재건축 사업 난항… 시공사 선정 문제에 조합 내부 갈등까지
  5. "부지 매입비 아끼고 주차난 푼다"…인천시, 공원 지하에 주차장 800면 조성

헤드라인 뉴스


세종 2031년까지 중앙행정기관 44곳 이전… 행정수도 발돋움

세종 2031년까지 중앙행정기관 44곳 이전… 행정수도 발돋움

정부가 2031년까지 수도권 소재 중앙행정기관 등 44개 기관의 세종 이전을 추진하면서, 세종시는 국가 균형발전을 견인하는 명실상부한 행정수도로 도약할 중대한 전기를 맞게 됐다. 수도권 일극체제를 종식하고 세종시를 실질적인 국정운영의 중심으로 만들기 위해 사실상 모든 중앙부처를 집결시키겠단 의지다. 정부는 임시 청사를 활용하는 27개 기관을 2027년부터 단계적으로 이전하고, 나머지 17개 기관은 2031년까지 독립 청사를 신축 후 순차적으로 이전할 방침이다. 특히 정부가 '행복도시법'상 이전 제외기관으로 규정된 외교·통일·국방·법..

與野 코레일 철도공단 국감 KTX·SRT통합 대립각
與野 코레일 철도공단 국감 KTX·SRT통합 대립각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한국철도공사·국가철도공단 국정감사에선 KTX와 SRT의 고속철도 통합 운행을 둘러싸고 여야가 대립각을 세웠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두 회사의 통합으로 철도 이용객 편의 증대와 운임 인하 효과가 있었다고 호평했다. 반면, 보수야당인 통합의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졸속 추진이라고 혹평하며 공세를 퍼부었다. 더불어민주당 염태영 의원은 "통합 운영 시작 이후 하루 평균 이용객이 전년 대비 12% 늘고 수서축 이용객은 28%가량 증가했으며, 국민 교통비 부담도 약 228억원 절감됐다"며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2026] 국감] 지식재산처 국감, `라방 위조상품 판매` 등 쟁점
[2026] 국감] 지식재산처 국감, '라방 위조상품 판매' 등 쟁점

13일 정부대전청사에서 진행된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의 지식재산처 국정감사에선 최근 라이브 방송을 통한 위조 상품 판매와 AI를 무단으로 악용하는 상업 서비스 등에 대한 대응 방안이 쟁점으로 다뤄졌다. 우선 더불어민주당 김원이 의원은 "예전에는 오프라인에서 은밀하게 위조상품을 판매했다면 이젠 인스타그램, 유튜브, 틱톡 등 해외 온라인 플랫폼에서 라이브 방송을 타고 위조 제품이 널리 퍼지고 있다"며 해외 SNS 라이브 방송을 통한 위조 상품 거래 실태와 지식재산처의 단속 및 대응 체계를 점검했다. 김 의원에 따르면 위조상품..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어르신들의 신중한 한수 어르신들의 신중한 한수

  • 기온 뚝…‘겉옷 챙기세요’ 기온 뚝…‘겉옷 챙기세요’

  • 구직자들로 북적이는 대전 일자리박람회 구직자들로 북적이는 대전 일자리박람회

  • 대덕구의회 파행에 뿔난 주민과 단식 돌입한 김찬술 구청장 대덕구의회 파행에 뿔난 주민과 단식 돌입한 김찬술 구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