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김정숙 충남대 교수 |
이러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빈곤'이라는 개념을 다시 물어야 한다. 빈곤은 흔히 소득이 부족한 상태로 이해되지만, 그 정의를 거기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빈곤은 인간이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는 결핍의 상태다. 여기서 기본적 욕구란 의식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자유롭고 평등하게 대우받고자 하는 욕구, 사회의 구성원으로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결정에 참여하고자 하는 욕구까지 포함한다. 끼니를 해결한다고 해서 인간다운 삶이 저절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목소리를 낼 수 없고, 관계에서 배제되며, 미래를 스스로 설계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면 그 역시 빈곤이다.
따라서 빈곤은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복잡다단한 사회적 관계의 문제다. 질병은 가난을 심화시키고, 가난은 치료와 돌봄의 기회를 제한한다. 재난과 재해는 취약한 이들의 삶터와 생계를 먼저 무너뜨리며, 환경파괴의 비용 역시 가장 적은 자원을 가진 사람들에게 집중된다. 기후재난이 반복될수록 폭염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 침수 위험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 냉난방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노인과 아동의 삶은 더욱 위태로워진다. 그러므로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가난한가'만이 아니다. '어떤 집단이, 어떤 조건에서, 왜 빈곤에 처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인공지능의 확산은 이 질문을 더욱 절실하게 만든다. AI는 지식과 의료, 행정과 교육의 접근성을 넓힐 수 있는 강력한 도구다. 동시에 정보와 교육의 격차, 데이터와 자본의 집중이 겹치면 새로운 불평등을 증폭시킬 수도 있다. 빌 게이츠가 인공지능을 인류가 만든 가장 위대한 평등 장치가 될 수도, 가장 나쁜 불평등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누군가는 AI를 통해 자신의 역량을 확장하고 새로운 기회를 얻지만, 누군가는 기기와 연결망, 문해력과 학습 기회의 부족 때문에 변화의 문턱에서 다시 배제될 수 있다. 기술의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기술에 접근하고 활용할 권리를 어떻게 공정하게 나눌 것인가의 문제다.
아마르티아 센은 『자유로서의 발전』에서 개발을 인간의 자유를 증진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빈곤, 독재, 경제적·사회적 기회의 박탈, 공공시설의 부족처럼 인간의 자유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일이 곧 발전이라는 뜻이다. 이 관점에서 교육은 단지 취업을 위한 훈련이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선택하며 타인과 더불어 살아갈 능력을 기르는 공공의 토대가 된다.
인간개발지수(HDI)가 기대수명·교육성취도·소득을 함께 고려해 삶의 질을 판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래 사는 것, 배우는 것, 소득을 얻는 것은 서로 분리된 목표가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떠받치는 조건들이다. 그러나 교육성취도를 경쟁의 서열로만, 소득을 성공의 유일한 척도로만 다룰 때 교육은 오히려 불안을 재생산한다. 행복한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은 더 빨리 앞서가는 사람만을 선별하는 교육이 아니라 뒤처진 사람이 다시 배우고 연결되며 존엄을 회복할 수 있게 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지속가능한 교육은 기후위기와 디지털 전환의 지식을 가르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타인의 결핍을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는 감수성, 공공의 문제에 참여하는 시민성, 서로 다른 삶의 조건을 이해하는 능력을 함께 길러야 한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안을 견디라고 개인에게만 요구하는 사회가 아니다. 누구도 생존과 소속, 참여의 권리에서 밀려나지 않도록 하는 사회, 그리고 그 가능성을 배우고 실천하게 하는 교육이다. 빈곤을 다시 정의하는 일은 결국 우리가 어떤 삶을 함께 지켜낼 것인가를 묻는 일이다.
/김정숙 충남대 지식융합학부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고미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