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시평] 불확실성의 시대, 빈곤을 다시 묻는 교육

  • 오피니언
  • 중도시평

[중도시평] 불확실성의 시대, 빈곤을 다시 묻는 교육

김정숙 충남대 지식융합학부 교수

  • 승인 2026-09-08 17:32
  • 신문게재 2026-09-09 18면
  • 고미선 기자고미선 기자
clip20260525172501
김정숙 충남대 교수
선진국이라는 이름은 대체로 풍요와 안정의 이미지로 읽힌다. 문화의 성취가 높아지고 과학기술의 수준이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산업과 생활 인프라의 지표도 개선되었다는 보도가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을 조금만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예측 가능한 삶의 감각보다 불안의 정서가 더 짙게 깔려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일자리와 주거, 돌봄과 노후, 기후와 건강의 문제가 서로 얽혀 개인의 삶을 압박한다. OECD의 최근 통계에서도 한국은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 23명 수준으로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삶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이 비극은 단지 개인의 심리적 취약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회적 슬픔이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빈곤'이라는 개념을 다시 물어야 한다. 빈곤은 흔히 소득이 부족한 상태로 이해되지만, 그 정의를 거기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빈곤은 인간이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는 결핍의 상태다. 여기서 기본적 욕구란 의식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자유롭고 평등하게 대우받고자 하는 욕구, 사회의 구성원으로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결정에 참여하고자 하는 욕구까지 포함한다. 끼니를 해결한다고 해서 인간다운 삶이 저절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목소리를 낼 수 없고, 관계에서 배제되며, 미래를 스스로 설계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면 그 역시 빈곤이다.

따라서 빈곤은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복잡다단한 사회적 관계의 문제다. 질병은 가난을 심화시키고, 가난은 치료와 돌봄의 기회를 제한한다. 재난과 재해는 취약한 이들의 삶터와 생계를 먼저 무너뜨리며, 환경파괴의 비용 역시 가장 적은 자원을 가진 사람들에게 집중된다. 기후재난이 반복될수록 폭염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 침수 위험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 냉난방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노인과 아동의 삶은 더욱 위태로워진다. 그러므로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가난한가'만이 아니다. '어떤 집단이, 어떤 조건에서, 왜 빈곤에 처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인공지능의 확산은 이 질문을 더욱 절실하게 만든다. AI는 지식과 의료, 행정과 교육의 접근성을 넓힐 수 있는 강력한 도구다. 동시에 정보와 교육의 격차, 데이터와 자본의 집중이 겹치면 새로운 불평등을 증폭시킬 수도 있다. 빌 게이츠가 인공지능을 인류가 만든 가장 위대한 평등 장치가 될 수도, 가장 나쁜 불평등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누군가는 AI를 통해 자신의 역량을 확장하고 새로운 기회를 얻지만, 누군가는 기기와 연결망, 문해력과 학습 기회의 부족 때문에 변화의 문턱에서 다시 배제될 수 있다. 기술의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기술에 접근하고 활용할 권리를 어떻게 공정하게 나눌 것인가의 문제다.

아마르티아 센은 『자유로서의 발전』에서 개발을 인간의 자유를 증진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빈곤, 독재, 경제적·사회적 기회의 박탈, 공공시설의 부족처럼 인간의 자유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일이 곧 발전이라는 뜻이다. 이 관점에서 교육은 단지 취업을 위한 훈련이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선택하며 타인과 더불어 살아갈 능력을 기르는 공공의 토대가 된다.

인간개발지수(HDI)가 기대수명·교육성취도·소득을 함께 고려해 삶의 질을 판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래 사는 것, 배우는 것, 소득을 얻는 것은 서로 분리된 목표가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떠받치는 조건들이다. 그러나 교육성취도를 경쟁의 서열로만, 소득을 성공의 유일한 척도로만 다룰 때 교육은 오히려 불안을 재생산한다. 행복한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은 더 빨리 앞서가는 사람만을 선별하는 교육이 아니라 뒤처진 사람이 다시 배우고 연결되며 존엄을 회복할 수 있게 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지속가능한 교육은 기후위기와 디지털 전환의 지식을 가르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타인의 결핍을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는 감수성, 공공의 문제에 참여하는 시민성, 서로 다른 삶의 조건을 이해하는 능력을 함께 길러야 한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안을 견디라고 개인에게만 요구하는 사회가 아니다. 누구도 생존과 소속, 참여의 권리에서 밀려나지 않도록 하는 사회, 그리고 그 가능성을 배우고 실천하게 하는 교육이다. 빈곤을 다시 정의하는 일은 결국 우리가 어떤 삶을 함께 지켜낼 것인가를 묻는 일이다.

/김정숙 충남대 지식융합학부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괴산고추축제에 32만2천명 찾아···건고추 완판 12억 원 판매
  2. 외딴섬 '집현동'이 뜨겁다… 9월엔 세종 '공동캠퍼스' 축제로
  3. [단독]단양수중보 3억6000만원 소송…관리책임 갈등 다시 법정으로
  4. 대전 갑천생태호수공원에 대형 꿈돌이·꿈순이 등장
  5. 대전 선도지구 구역들, 주민대표단 신청 분주한데 승인 지연돼 '발 동동'
  1. [2027 수시로 간다-대학의 색, 미래의 선택] 기업이 대학 안으로… 충남대가 다시 짜는 첨단산업 교육
  2. 의대 중도탈락자 10명 중 8명 비수도권… 충청권 66명
  3. [현장취재] <오솔길에서 만난 다산> 출판기념 차담회
  4. [제일학원] 9월 모평 가채점 충남대 의예 281점·심리 229점 지원 가능
  5. 한밭대 총장 후보 3인, ‘100년 대학’ 미래전략 놓고 열띤 공방

헤드라인 뉴스


허태정 대전시장 "대전역세권 복합2구역 사업 무산 대비해라"

허태정 대전시장 "대전역세권 복합2구역 사업 무산 대비해라"

허태정 대전시장이 추진 무산위기에 놓인 대전역세권 복합2-1구역 사업에 대해 사업자 측에 정상화를 촉구하는 한편 무산 시 대응 전략 마련을 주문했다. 허 시장은 8일 열린 확대간부회의에서 "시민들에게 이런(대전역세권 복합2-1구역 사업 무산 위기) 흐름이 알려진 건 최근이지만, 이미 시장 취임 전부터 사업이 진척되지 않아 무산될 위기라는 점을 감지했다"면서 "시가 어떤 조치를 하고 있는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허 시장은 "한화컨소시엄 측에도 명확히 시 입장과 시민 목소리를 전달하고, 사업이 책임감 있게 진행될 수 있도..

"태안 안면도 관광개발 연내 결단"…박수현 지사, 지역현안 적극 지원 약속
"태안 안면도 관광개발 연내 결단"…박수현 지사, 지역현안 적극 지원 약속

충남도가 석탄화력발전소 단계적 폐쇄로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직면한 태안군의 미래 발전과 체질 개선을 위해 전방위 지원에 나선다. 박수현 충남지사는 8일 태안군을 방문해 민선 9기 시·군 방문 브랜드인 '충남통(通)행' 두 번째 일정을 소화하며 발전공기업 통합본사 유치, 가로림만 해상교량 재도전, 안면도 관광지 개발 연내 결단 등 주요 현안에 대한 정면 돌파 의지를 피력했다. 박 지사는 이날 태안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열린 군민과의 대화 행사를 통해 태안을 석탄화력발전소 폐지의 위기를 넘어 '서해안 대전환의 중심지'로 육성하겠다는..

한 총리 "중앙행정기관·공공기관 이전계획 수립, 만전 기해달라"
한 총리 "중앙행정기관·공공기관 이전계획 수립, 만전 기해달라"

한성숙 국무총리는 8일 최근 발표한 중앙행정기관과 공공기관 이전과 관련, "관련 부처는 대상기관 확정 등 연내에 발표할 추진계획 수립에 만전을 기해달라"고 말했다. 한 총리는 이날 오전 해외 순방 중인 이재명 대통령을 대신해 정부서울청사에서 주재한 제39회 국무회의에서 "국가균형발전과 대한민국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시대적 과제"라며 이같이 지시했다. 한 총리는 "물론 이전 대상 기관에는 결코 쉽지 않은 변화일 것"이라면서도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위한 결정이었음을 이해하고 함께해 주실 거라 굳게 믿는다. 정부..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나눔의 의미도 배우고 책도 읽고’ ‘나눔의 의미도 배우고 책도 읽고’

  • 충남대학교와 국립공주대학교 통합 찬반 투표 시작 충남대학교와 국립공주대학교 통합 찬반 투표 시작

  • ‘고장난 전자기기 고쳐드려요’ ‘고장난 전자기기 고쳐드려요’

  • 가을 문턱…탐스럽게 익어가는 도깨비 박 가을 문턱…탐스럽게 익어가는 도깨비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