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필톡] 샤넬 넘버 5와 반지하방 냄새

  • 오피니언
  • 우난순의 필톡

[우난순의 필톡] 샤넬 넘버 5와 반지하방 냄새

  • 승인 2019-06-12 10:46
  • 신문게재 2019-06-13 22면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기생충
6월이 되면 천지 사방에 퍼지는 냄새가 있다. 밤꽃 냄새다. 산들바람이 부는 초여름의 밤, 창문을 열면 어김없이 밤꽃 향이 멀리 있는 산에서 도심지까지 풍긴다. 특유의 밤꽃 냄새가 나면 나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리며 '이제 여름이 시작되는구나'라는 걸 실감한다. 자연이 선물하는 계절의 순수한 향, 얼마나 큰 축복인가. 라일락, 쥐똥나무, 아카시아, 장미…. 분분한 향에 취하다 보면 이 세상이 천국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악취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달콤한 향기와 쾨쾨하고 음습한 냄새. 냄새는 계층을 가르는 메타포인가.

지난 겨울, 주말 아침 일찍 기차를 타기 위해 대전역에 갔었다. 시간이 남아 대합실에서 어슬렁거리는데 몇 명의 노숙인들이 보였다. 그 중 나이가 꽤 들어보이는 노인이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졸고 있었다. 행색이 말이 아닌 걸로 봐서 노숙 생활을 오래한 듯 했다. 덥수룩한 머리는 떡졌고 양말을 신지 않은 발은 때와 허연 각질로 더께가 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역한 냄새가 주변에 진동했다. 그 꼬리꼬리한 냄새는 노인의 삶을 증명했다. 어느 누구도 섣불리 다가갈 수 없게 하는 냄새. 노인 주위의 의자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노숙인과 깨끗하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사람들과의 사이엔 선이 분명하게 그어졌다. 밤새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잠에 빠진 노인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화 '기생충'을 보았다. 봉준호는 자본주의의 허상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드는 감독이다. 그는 달달한 사랑놀음이나 디즈니식의 판타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는 폭력적이면서 유머러스하다. 신자유주의의 만행을 어찌 진지하게만 다룰 수 있을까. 그 끔찍함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봉준호도 없는 모양이다. 차고 넘치는 은유! "내가 원래 선을 넘는 사람을 싫어하는데. 김 기사는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면서도 절대 선을 안 넘어. 근데 냄새가 선을 넘지… 지하철 타면 나는 냄새 있어. 지하철 타는 놈들의 특유의 냄새." IT 기업의 유능한 CEO 박 사장은 상류층의 조건을 다 갖췄다. '샤넬 넘버 5'가 어울리는 아름다운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언덕위에 우뚝 솟은 웅장한 대저택. 박 사장의 운전사 기택네 가족은 전체가 백수로 반지하방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계급과 불평등은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가장 예민한 문제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이 살벌한 사회 시스템 안에서 실존적 개인들은 권력과 부를 놓고 스스로 얼마나 비열하고, 잔인하고, 비굴할 수 있는지를 체득한다. 이것은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화의 경제체제는 민주주의의 미명 하에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이 더 부유해지는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는 상황을 초래했다. 토마 피케티는 이것을 '세습 자본주의'라고 명명했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런데도 왜 불평등에 대한 분노의 목소리는 없고 현실 긍정의 찬가가 유행하는 지 의아해했다. 정말 사회적 불평등의 행진을 막을 방법은 아무것도 없을까.



5월호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아이티의 재래식 변소를 청소하는 노동자가 실렸다. 일명 '바야쿠'라고 하는데 이들은 아이티의 불안정한 하수체계에선 없어선 안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바야쿠를 비난한다. 더럽고 냄새나는 똥을 떡 주무르듯 하기 때문이다. 바야쿠들 스스로도 가족에게조차 직업을 숨긴다. 엑실리엔이라는 바야쿠는 그 일을 자랑스러워하고 존중받기를 원한다며 똥으로 범벅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줬다. 치명적인 냄새가 몸에 밴 엑실리엔은 사람들에게 존중받을까. 박 사장도 표 나지 않게 기택을 멸시한다. 숙주가 반드시 필요한 기생충 기택의 운명. 자기모멸을 각인시킨 숙주 박 사장을 죽인 기택의 행로는 쓸쓸하고 슬프도다. <미디어부 부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경기 프리미엄버스 P9603번 운행개시
  2. [기획] 의정부시, 우리동네 정책로드맵 ‘장암동편’
  3. 유성복합터미널 3개사 공동운영체 출범…터미널·정류소 흡수·통합 본격화
  4. 첫 대전시청사 복원활용 탄력 붙는다
  5. 누리호 4차 발사 D-4… 국민 성공기원 분위기 고조
  1. '세종시=행정수도' 진원지, 국가상징구역...공모작 살펴보니
  2. 충남도 청렴 파트너 '제8기 도민감사관' 출범
  3. 헌법파괴 비윤리적 2025 인구주택총조사 국가데이터처 규탄 기자회견
  4. 홀트대전한부모가족복지상담소, 대전아동기관단체와 협약
  5. 온새미로 봉사단과 함께하는 사랑의 소규모 집수리

헤드라인 뉴스


대출에 짓눌린 대전 자영업계…폐업률 6대 광역시 중 두번째

대출에 짓눌린 대전 자영업계…폐업률 6대 광역시 중 두번째

대전지역 자영업자들이 극심한 불황을 견디지 못하고 잇따라 폐업의 길로 내몰리고 있다. 특히 도소매업의 경우 대출 증가와 폐업률 상승이 두드러지면서, 이들을 위한 금융 리스크 관리와 맞춤형 정책 지원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24일 한국은행 대전세종충남본부가 발표한 '대전지역 자영업 현황 및 잠재 리스크 점검'에 따르면 2025년 2분기 기준 대전지역 자영업자 수는 15만 3000명으로 집계됐다. 2023년 이후 감소세를 보인 다른 광역시와 달리 대전의 자영업 규모는 오히려 확대되는 추세다. 전체 취업자 수 대비 자영업자가 차..

갑천에서 18홀 파크골프장 무단조성 물의… 대전시, 체육단체장 경찰 고발
갑천에서 18홀 파크골프장 무단조성 물의… 대전시, 체육단체장 경찰 고발

대전 유성구파크골프협회가 맹꽁이와 삵이 서식하는 갑천 하천변에서 사전 허가 없이 골프장 조성 공사를 강행하다 경찰에 고발당했다. 스프링클러를 설치하고 나무를 심으려 굴착기를 동원해 임의로 천변을 파내는 중에 경찰이 출동해 공사가 중단됐는데, 협회에서는 이곳이 근린친수구역으로 사전 하천점용허가가 없어도 되고 불법도 아니라는 입장이다. 24일 대전시하천관리사업소와 대전충남녹색연합에 따르면, 유성구 탑립동 용신교 일대의 갑천변에서 11월 15일부터 17일까지 굴착기가 땅을 헤집는 공사가 이뤄졌다. 대덕테크노밸리에서 대덕구 상서동으로 넘어..

세종 도시재생 `컨트롤타워` 생긴다… 본보 지적에 후속대책
세종 도시재생 '컨트롤타워' 생긴다… 본보 지적에 후속대책

<속보>=세종시 도시재생사업을 총괄 운영할 '컨트롤타워'가 내년 상반기 내 설립될 예정이다. 국비 지원 중단 등 재정난 속 17개 주민 거점시설에 대한 관리·운영 부실 문제를 지적한 중도일보 보도에 후속 대책을 내놓은 것이다. <중도일보 11월 19일자 4면 보도> 세종시는 24일 오전 10시 기자간담회를 통해 도시재생 사업의 주민 거점시설 운영 현황과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다. 본보는 10년 차 세종시 도시재생 사업을 추진하는 광역도시재생지원센터와 현장지원센터 5곳이 폐쇄한 작금의 현실을 고발하며, 1000억 원에 달하는 혈세 투입..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주렁주렁 ‘감 따기’ 주렁주렁 ‘감 따기’

  • 대전 불꽃쇼 기간 도로 통제 안내 대전 불꽃쇼 기간 도로 통제 안내

  • 주택재건축 부지 내 장기 방치 차량 ‘눈살’ 주택재건축 부지 내 장기 방치 차량 ‘눈살’

  • 은빛 물결 억새의 향연 은빛 물결 억새의 향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