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닳고 닿은

  • 오피니언
  • 편집국에서

[편집국에서] 닳고 닿은

  • 승인 2019-09-08 10:13
  • 수정 2020-06-30 11:34
  • 박새롬 기자박새롬 기자
최근 두 번의 북토크에 다녀왔다. 연작소설 <대도시의 사랑법>으로 출간 7주만에 10쇄를 찍은 박상영 작가, 등단 17년 만에 첫 산문집을 낸 김애란 작가의 북토크였다.

행사 시작 30분 전 북토크가 열리는 서점에 도착했지만 앞쪽에는 이미 빈 의자가 없었다. 좋아하는 작가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열정이 밀집해 있었다. 작가들의 말은 책 속 문장과 비슷하게 깊은 감상을 주기도 하고, 막연히 상상했던 이미지 그대로 이거나 더욱 밝기도 했다. 사람들은 반짝이는 눈을 하고는 귀를 기울였다.

마지막 순서는 사인회였다. 사회자의 멘트가 끝나자마자 독자들은 순식간에 앞을 향해 모였다. 차례차례, 이름을 또박또박 말하고 작가에게 이야기와 선물을 건네며 미소 지었다. 얼핏 듣기에도 평소부터 가져왔던 작가와 작품에 대한 관심이 눈에 보였다.

사인을 받지 않기로 마음먹은 건 북토크가 시작할 무렵이었다. 페이지 사이로 셀 수 없이 많은 책갈피가 꽂혀있는 다른 독자들의 책을 보니, 산지 얼마 되지 않은 티가 나는 책을 내밀기가 민망했다. 책 모서리가 닳도록 읽은 사람들이 누려야 할 기회를, 운이 좋아 빼앗은 것 같아 부끄러웠다.



1990년대 후반, 천계영 작가의 만화 『언플러그드 보이』는 센세이셔널이라고 할 만한 인기를 끌었다. '난… 슬플 땐 힙합을 춰'라는 주인공의 대사가 지금도 회자된다. 작가의 그림은 팬시용품, 인기 아이돌의 뮤직비디오로 만들어졌다. 이후 발표한 작품인 『오디션』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두 차례 수상하는 영광도 작가에게 주어졌다.

작가의 최신 작품 '좋아하면 울리는'은 2014년부터 연재된 웹툰이다. 얼마전 배우 김소현과 정가람 주연으로 넷플릭스에 공개됐던 드라마의 원작이다. 만화책과 멀어진 일상을 보내고 있었기에, 드라마와 연관된 뉴스로 접한 작가의 소식에 그리 큰 감흥은 없었다. 20년 전 데뷔해 아직도 활동하고 있다는 반가움 정도였다. 그러나 최근 1년이 넘는 휴재를 마치고 재연재를 시작했다는 뉴스에는 놀라운 사실이 있었다. 천계영 작가의 손은 더 이상 마우스를 쥐고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상태였다.

만화가로 사는 동안 진행된 퇴행성 관절염은 심각했다. 하루 16~18시간, 주 6일의 작업은 그의 연골을 닳게 했다. 칫솔을 쥐는 것조차 힘겨웠다고 한다. 치료를 위해 노력했지만 닳아버린 연골의 기능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만화를 포기하지 않았다. 손이 아닌 다른 도구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최근 작업은 목소리로 컴퓨터에 명령어를 입력하면 그림을 그려주는 프로그램으로 이뤄진다고 한다. 유튜브로 공개된 작업 모습은 전보다 훨씬 속도가 느렸다. 그러나 다시는 작품을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독자들의 걱정과, 작가가 했을지 모를 창작에 대한 불안을 지우는 데는 충분해 보였다.

모서리가 닳도록 책을 읽는다. 연골이 다 닳도록 그림을 그린다. 좋아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 마음이 사람을 만나고 싶게 한다. 절망과 불안을 들어내고 창작을 위한 새로운 도전을 하게 한다. 눈을 마주치며 사인을 받을 수 있는 팬의 자신감, 단행본 100만권 판매와 드라마로 제작될 만큼의 작품을 창조했다는 작가의 자부심은 그렇게 노력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몫일 것이다. 가진 것이 닳아버릴 만큼 노력하는 게 아픈 만큼, 원하던 일에 닿는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룬 것 없이 한해가 끝날 거라는 불안이 곧 낙엽처럼 가슴에 질 무렵이다. 뒤이어 이만하면 됐다는 한심한 안도가 눈처럼 그 위를 덮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무언가 닳도록 노력한 사람들의 얼굴은 그 너머 빛나고 있을 것을 이제 알았다.


박새롬 기자 onoino@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논란의 금속보호대 대전교도소 1년간 122회 사용… 기록누락 등 부실도
  2. 이철수 폴리텍 이사장, 대전캠퍼스서 ‘청춘 특강’… 학생 요청으로 성사
  3. 고교학점제 취지 역행…충청권 고교 사교육업체 상담 받기 위해 고액 지불
  4. ‘숭고한 희생 잊지 않겠습니다’
  5.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대전충청본부, 치매안심센터 찾아 봉사활동
  1. 서울대 10개 만들기·탑티어 교수 정년 예외…교육부 새 국정과제 본격 추진
  2. 세종 BRT예정지 미리알고 땅 매입한 행복청 공무원 "사회적 신뢰 훼손"
  3. "치매, 조기진단과 적극적 치료를" 충남대병원 건강강좌
  4. 새 정부 교육 국정과제 '시민교육 강화' 대전교육 취약 분야 강화 기대
  5. [세종 다문화] 군사 퍼레이드와 역사 행사, 다문화 가정이 느끼는 이중적 의미

헤드라인 뉴스


충남도 5년간 11조 투입해 서해안 수소벨트 구축

충남도 5년간 11조 투입해 서해안 수소벨트 구축

충남도가 석탄화력발전소 밀집 지역인 서해안 일원에 친환경 수소산업 벨트를 구축한다. 도는 수소 생산부터 저장, 활용까지 국내 최대 수소산업 클러스터를 구축해 글로벌 수소 허브로 탈바꿈시킨다는 목표다. 김태흠 지사는 18일 서산 베니키아호텔에서 열린 '제7회 수소에너지 국제포럼'에서 19개 기관·단체·대학·기업과 업무협약을 맺고, 서해안 수소산업 벨트 구축 본격 추진을 선언했다. 이날 포럼에는 김 지사와 제프 로빈슨 주한 호주 대사, 니쉬 칸트 씽 주한 인도 대리 대사, 예스퍼 쿠누센 주한 덴마크 에너지 참사관 등 500여 명이 참석..

불꽃야구, 한밭야구장에서 직관 경기 열린다
불꽃야구, 한밭야구장에서 직관 경기 열린다

리얼 야구 예능 '불꽃야구'가 대전 한밭야구장(대전 FIGHTERS PARK)에서 21일 오후 5시 직관 경기를 갖는다. 18일 대전시에 따르면 이번 경기는 한밭야구장을 불꽃야구 촬영·경기 공간으로 활용하기로 한 협약 이후 시민에게 개방되는 첫 무대다. '불꽃야구'는 레전드 선수들이 꾸린 '불꽃 파이터즈'와 전국 최강 고교야구팀의 맞대결이라는 예능·스포츠 융합 콘텐츠로 주목받고 있다. 21일 경기는 수원 유신고와 경기를 갖는다. 유신고는 2025년 황금사자기 준우승, 봉황대기 4강에 오른 강호로, 현역 못지않은 전직 프로선수들과의..

추석 앞두고 대전 전통시장 찾은 충청권 경제단체장들 "지역경제 숨통 틔운다"
추석 앞두고 대전 전통시장 찾은 충청권 경제단체장들 "지역경제 숨통 틔운다"

충청권 경제 단체들이 추석을 앞두고 대전지역 전통시장을 찾았다. 내수 침체로 활력을 잃은 지역경제에 숨통을 틔우기 위한 캠페인을 위해서다. 특히 이번 캠페인에는 이상천 대전세종중소벤처기업청장이 취임 직후 첫 공식일정으로 민생현장을 찾아 눈길을 끌었다. 대전세종충남경제단체협의회(회장 정태희)는 지난 17일 오전 대전 서구 한민시장에서 '지역경제 활성화 캠페인'을 개최했다. 행사에는 이상천 중기청장을 비롯해 정태희 회장(대전상의 회장), 김석규 대전충남경영자총협회장, 송현옥 한국여성경제인협회 대전지회장, 김왕환 한국무역협회 대전세종충남..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민생회복 소비쿠폰 2차 지급 준비 만전 민생회복 소비쿠폰 2차 지급 준비 만전

  • 2025 적십자 희망나눔 바자회 2025 적십자 희망나눔 바자회

  • 방사능 유출 가정 화랑훈련 방사능 유출 가정 화랑훈련

  • ‘숭고한 희생 잊지 않겠습니다’ ‘숭고한 희생 잊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