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공론] 상실시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 문화
  • 문예공론

[문예공론] 상실시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장준문/ 조각가, 수필가

  • 승인 2019-12-10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서울 태평로 소재 삼성생명본관 '로댕갤러리'에는 로댕의 대표작 중 하나인 '깔레의 시민'이 '지옥의 문'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깔레의 시민'은 프랑스 로댕재단의 마지막 카피인 12번째 작품으로 오래 전 설치초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본 적이 있다.

이 작품은 영·불간의 백년전쟁 중 깔레 시(市)에 대한 영국군의 인질요구에 절망적 상황의 시(市)를 구하고자 스스로 나선 여섯 명 원로의 비장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 스토리를 조각가 로댕이 소상으로 만든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이다. 1, 2차 세계대전에서는 영국 고위층자제가 다니던 이튼칼리지출신 2,000여 명이 전사했고, 포클랜드전쟁에서는 영국여왕의 둘째 아들 앤드루가 전투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한국전쟁에서도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아들이 육군소령으로 참전했으며, 미 8군 밴플리트 사령관을 비롯한 미군장성의 아들 142명이 참전해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고 한다. 자식의 병역면제를 아비의 능력쯤으로 아는 우리의 일부 고위층이 반영으로 떠오르는 대목이다.

우리에게도 국난의 시기에 명문가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적지 않았다. 고교시절 통학열차가 안동역 도착을 알리는 기적을 울릴 즈음, 오른 쪽 산기슭에 넓게 펼쳐진 와가가 보인다. 문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언급한 임청각(臨淸閣)이다. 열차에서 내린 후 다시 그 쪽으로 걸어서 학교방향으로 낙동강을 건너는 마뜰다리 초입 부근에 있어서 지금도 모습이 선하다.



임청각 주인 석주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선생은 나라가 망하자 독립운동 자금으로 헌납할 현 시가(時價) 400억 원 가량의 전 재산을 처분한 후 상해 임시정부로 가서 국무령(대통령 격)으로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셨다. 일제는 그런 선생에 보복하고자 낙동강 변까지 펼쳐져 있던 아흔아홉 칸 임청각의 가운데로 중앙선 철길을 내서 지금은 50여 칸 정도만 남아 있다. 정부에서는 건물을 곧 원형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대통령은 석주선생과 데칼코마니 같은 이회영 선생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두 분은 당대 대표적 명문가의 후예로서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헌납한 점이 아주 비슷하다.

우당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선생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이조판서 이유승의 6형제 중 넷째로 서울태생이다. 한일병탄 후인 1910년 12월, 명문가의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독립운동자금으로 헌납할 현 시가 600억 원가량의 전 재산을 처분해 6형제의 가족·노비 등 40여 명 전체가 만주로 망명했다. 떠나기 전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존대하며 가족처럼 함께했다. 신민회, 헤이그 특사, 신흥무관학교, 의열단 등 중국 항일운동의 거의 모든 분야에 관계하며 대한민국 건국에 이바지한 그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가계에서 알려진 인물로는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인 아우 이시영(李始榮), 손자로 이종찬 전 국정원장과 현 여당소속 이종걸 의원이 있다. 그중 이종찬은 신군부 쿠테타 이후 전두환 국보위를 시작으로 민정당 창당주역으로서 민정당, 민자당을 거치며 다년간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등 김대중 정권시절까지 권력의 한 가운데 있었다. 신 군부 인물로는 비교적 온유한 성품이나 정치적 행보는 전두환의 국보위로부터 시류에 따라 변신함으로써 명문가의 명예에 옥에 티를 남겼다 할 수 있다.

문대통령은 지난 현충일 추념사에서 위의 두 분과 함께 채명신(蔡命新, 1926~2013) 전 주월사령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장군은 한국전쟁과 월남전 등에서 무수한 전공을 세운 대한민국의 대표적 군인이지만 국립서울현충원의 8평 장군묘역을 마다하고 한 평 사병묘역에 묻혔다고 한다. 내가 장군이 된 것은 전쟁터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린 사병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우들이 묻힌 사병묘역에 묻어 달라고 한 유언 때문이라고 한다.

그분의 참 군인정신에 머리 숙이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그 밖에도 국민보건을 위해 유한양행을 설립하여 정직한 기업경영의 모범을 보이고, 전 재산을 사회에 기증하라고 유언을 남긴 기업인이자 교육자, 독립운동가인 유일한(柳一韓, 1895~1971) 박사 등 아름다운 삶을 사신 분들은 적지 않다.

우리나라에는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목숨 바쳐 일제와 싸운 수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이 계셨다. 이분들처럼 영웅적인 삶을 살다 가신 이들을 생각하면 과연 이 시대에도 그런 헌신적인 인물들이 존재할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필자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한 부끄러움과 함께, 그래도 이 혼란의 시기에 나라가 허물어지지 않은 것은 곳곳에서 묵묵히 자기 몫을 충실히 하는 양심적인 국민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장준문/ 조각가, 수필가

1-장준문 수필가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천안 불당중 폭탄 설치 신고에 '화들짝'
  2. 대전방산기업 7개사, '2025 방산혁신기업 100'선정
  3. 대전충남통합 추진 동력 확보... 남은 과제도 산적
  4. 의정부시 특별교통수단 기본요금, 2026년부터 1700원으로 조정
  5. "신규 직원 적응 돕는다" 대덕구, MBTI 활용 소통·민원 교육
  1. 중도일보, 목요언론인상 대상 특별상 2년연속 수상
  2. 대전시, 통합건강증진사업 성과공유회 개최
  3. [오늘과내일] 대전의 RISE, 우리 지역의 브랜드를 어떻게 바꿀까?
  4. 대전 대덕구, 와동25통경로당 신축 개소
  5. [월요논단] 대전.세종.충남, 문체부 지원사업 수주율 조사해야

헤드라인 뉴스


`벌써 50% 돌파`…대전 둔산지구 통합 재건축 추진준비위, 동의율 확보 작업 분주

'벌써 50% 돌파'…대전 둔산지구 통합 재건축 추진준비위, 동의율 확보 작업 분주

대전시의 노후계획도시정비 기본계획안이 최근 공개되면서, 사업대상지 내 통합 재건축을 추진하는 아파트 단지들이 선도지구 선정을 위한 동의율 확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8일 지역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대전 둔산지구 통합14구역 공작한양·한가람아파트 단지 재건축추진준비위원회는 최근 다른 아파트 단지 대비 이례적인 속도로 소유자 동의율 50%를 넘겼다. 한가람은 1380세대, 공작한양은 1074세대에 이른다. 두 단지 모두 준공 30년을 넘긴 단지로, 통합 시 총 2454세대 규모에 달한다. 공작한양·한가람아파트 단지 추진준비위는 올해..

[충남 소상공인 재기지원] 위기의 소상공인 다시 일어서다… 경영·디지털·저탄소 전환까지 `맞춤형 종합지원`
[충남 소상공인 재기지원] 위기의 소상공인 다시 일어서다… 경영·디지털·저탄소 전환까지 '맞춤형 종합지원'

충남경제진흥원이 올해 추진한 소상공인 지원사업은 경영개선부터 저탄소 전환, 디지털 판로 확대, 폐업 지원까지 영역을 넓히며 위기 대응체계를 강화했다. 매출 감소와 경기 둔화로 어려움을 겪는 도내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실질적인 경영지원금을 지급하고 친환경 설비 교체와 온라인 마케팅 지원 등 시장 변화에 맞춘 프로그램을 병행해 현장의 반응도 긍정적이다. 진흥원의 다양한 지원사업의 내용과 성과를 점검하며 충남 소상공인 재기지원 우수사례를 살펴본다. <편집자 주> 충남경제진흥원이 경영난을 겪고 있는 소상공인을 구제하기 위해 다양한 지원시스템..

유성복합터미널 1월부터 운영한다
유성복합터미널 1월부터 운영한다

15여년 간 표류하던 대전 유성복합터미널이 1월부터 운영 개시에 들어간다. 8일 대전시에 따르면 유성복합터미널의 준공식을 29일 개최한다. 유성광역복합환승센터 내에 조성되는 유성복합터미널은 총사업비 449억 원을 투입해, 대지면적 1만5000㎡, 연면적 3858㎡로 하루 최대 6500명이 이용할 수 있는 규모로 건립된다. 내년 1월부터 서울, 청주, 공주 등 32개 노선의 시외 직행·고속버스가 운행되며, 이와 동시에 현재 사용 중인 유성시외버스정류소 건물을 리모델링해 4월까지 정비를 완료할 예정이다. 터미널은 도시철도 1호선과 BR..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부산으로 이사가는 해양수산부 부산으로 이사가는 해양수산부

  • 알록달록 뜨개옷 입은 가로수 알록달록 뜨개옷 입은 가로수

  • ‘충남의 마음을 듣다’ 참석한 이재명 대통령 ‘충남의 마음을 듣다’ 참석한 이재명 대통령

  • 2026학년도 수능 성적표 배부…지원 가능한 대학은? 2026학년도 수능 성적표 배부…지원 가능한 대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