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속으로]정치적인 '말잔치'의 함정

  • 오피니언
  • 세상속으로

[세상속으로]정치적인 '말잔치'의 함정

이성만 배재대 교수

  • 승인 2020-01-13 15:54
  • 신문게재 2020-01-14 22면
  • 이상문 기자이상문 기자
이재만
이성만 배재대 교수
'많이 말하지 않는 것이 많이 말하는 것.' 특히나 정치에서 쓰이는 말잔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성서에서 "오직 너희 말은 옳으면 옳다, 아니면 아니라 하라"(마태 5:37)고 했지만, 언론 민주주의에는 '둘 다' 적용된다. 사람들, 특히나 유권자들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히 공허하고 흐릿한 빈말에 기대기를 즐긴다. 이게 정치적인 횡설수설 말잔치이다. 번지르르한 문장들로 가득한, 공허한 말잔치 말이다. 니클라스 루만도 'lingua franca'에 기대어 정치인 그들만의 통용어라는 뜻으로 'lingua blablativa'란 말을 만들어냈다.

맞는 말이다. 근래에 복지정책과 관련해서 정치인들은 '시민들에게 그들이 낸 돈을 돌려줄' 때가 되었노라고 한다. 좋게도 들린다. 하지만 흘려듣기에는 너무나 위험할 수 있다. 우리에게 사소한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수많은 문장들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정치인들에게는 세계에 대한 대중의 인식뿐 아니라 현실 그 자체도 입맛대로 바꿀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니체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내면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사건'을 만들기에 충분하다"고 했다. 어떤 이가 '말이 곧 행동'이란 뜻으로, 정치는 세상을 바라보는 일종의 안경을 제공하고, 이를 토대로 세상을 재구성하는 행동양식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의 사회보장제도에 관련해서 복지혜택이 삭감되어야 한다고 말한다고 하자. 상대측에서는 누구나 자신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어야 한다고 '시민들에게 그들의 돈을 돌려주자'고 말한다고 하자. 그 누구도 빼앗긴 것을 되찾는 것을 막을 방도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표현에는 적지 않은 이데올로기가 내재해 있다. '돌려주기'란 말을 사용하는 정치인들은 개인의 일상생활에서 이해할 수 있는 반사작용, 그러니까 누가 세금을 기꺼이 낼까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러나 이 표현의 이면에는 민주적으로 구축된 사회복지국가의 원칙에 대한 공격이 감춰져 있다.

한편으로 국가는 시민들에게 적대 세력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국가는 시민들로부터 거둬들인 돈으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물론 국가는 도로, 학교, 사회 복지, 대내외 안보나 부채탕감 등의 형태로 시민들에게 날마다 돌려주고 있다.



사람들은 정부의 돈 씀씀이를 좋은 이유에서 비판할 수도 있고, 또한 좋은 이유에서 정부를 투표로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가 단순히 돈을 독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적어도 민주주의에서는 그렇다. 누가 봐도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이니까.

그런데 시민들의 돈으로 또 다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다. 새롭게 재분배하고 있는 것이다. 세금을 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을 버는 사람들도 당연히 학교, 도로, 사회 복지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고 또 이용해야 한다. 다시, 좋은 이유에서 우리는 훨씬 더 공정한 재분배를 바랄 수도 있다. 그러나 시민들에게 되돌려준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이것일까. 아닐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국가가 되도록 약하게 조세하는 기관, 재분배하는 기관의 역할을 하길 바란다. 그들은 모두가 자기 스스로를 배려할 때 모든 사람들이 더 잘 보살펴진다는 냉소적인 원칙을 따른다. 그리고 돌려주기를 하면 부자들이 더 많은 몫을 받게 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재분배가 역행하는 셈이다.

금년은 총선의 해다. 곧 선거운동으로 정치적인 말잔치가 시작된다는 뜻이다. '돌려주기'라는 음흉한 구절도 유행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말이 곧 행동'임을 보여주는 정부를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 정의와 사회적 응집은 손상될 게 뻔하다. '시민들에게 그들이 낸 돈을 돌려준다.' 이것이 정치적인 말잔치일 뿐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선거 이후에 화들짝 놀라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이성만 배재대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조국혁신당 세종시당, '내홍' 뚫고 정상화 시동
  2. 대전서 개최된 전 세계 미용인의 축제
  3. 세종시, 2025년 '규제혁신+투자유치' 우수 지자체 영예
  4. 대전인자위, 지역 인력수급 변화·일자리 정책 방향 모색
  5. 제2회 국민통합포럼 국민주권정부의 성공조건과 국정리더십의 과제
  1. 보이스피싱에 속아 빼앗긴 3900만원 대전경찰이 되찾아줘
  2. '스포츠세종 포럼' 2025년 피날레...관광·MICE 미래 찾기
  3. 국립세종수목원, 지속 가능 경영...피나클 어워드 은상
  4. 가짜뉴스의 폐해와 대책 심포지엄
  5. 조상호 국정기획위원, 내란 척결 촉구....세 가지 대안 제시

헤드라인 뉴스


트램 1900억 세종의사당 956억…충청 성장판 놨다

트램 1900억 세종의사당 956억…충청 성장판 놨다

이재명 정부 첫 예산안에 대전 트램 1900억원, 국회 세종의사당 956억원, 대통령 세종집무실 240억원 등 충청 현안 추진을 위한 국비가 각각 확보됐다. 또 충청권 광역철도 1단계 사업 547억원, 청주공항 민간활주로 5억원, 세종지방법원 10억원도 반영됐다. 충청권 각 시도와 여야 지역 의원들에 따르면 전날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728조원 규모의 2026년 정부예산안에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충청권 현안 사업이 포함됐다. 어느 때보다 치열한 예산 국회 속 충청권이 이재명 정부 집권 2년 차 대한민국 호(號) 신성장 엔진 도약..

[르포] 일본의 가락시장 도요스, 유통 시스템은 정반대?
[르포] 일본의 가락시장 도요스, 유통 시스템은 정반대?

우리에겐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동해를 사이에 둔 지리적 특징으로 음식과 문화 등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 양국 모두 기후 위기로 인해 농산물의 가격 등락과 함께 안정적 먹거리 공급에 대한 요구를 받고 있다. 이에 유통시스템 개편을 통한 국가적 공동 전략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중도일보는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주관한 4박 5일간의 일본 현장 취재를 통해 현지 농산물 유통 전략을 살펴보고, 한국 전통주의 새 활로를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도요스 중앙 도매시장의 정가 거래..

[기획] `인삼의 고장` 금산의 지방소멸 위기 해법 `아토피 자연치유마을`
[기획] '인삼의 고장' 금산의 지방소멸 위기 해법 '아토피 자연치유마을'

지방소멸 위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충남 금산군이 '아토피자연치유마을'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다. 전국 인삼의 80%가 모이며 인구 12만 명이 넘던 금산군은 산업구조 변화와 고령화, 저출산의 가속화로 현재는 인구 5만 명 선이 무너진 상황이다. 금산군은 지방소멸 위기를 '치유와 힐링'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아토피자연치유마을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자연환경을 기반으로 공동체를 만들고 '아토피·천식안심학교' 상곡초등학교를 중심으로 금산에 정착하고 있는'아토피자연치유마을' 통해 지방소멸의 해법의 가능성을 진단해 본..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12·3 비상계엄 1년…‘내란세력들을 외환죄로 처벌하라’ 12·3 비상계엄 1년…‘내란세력들을 외환죄로 처벌하라’

  • 양자 산업화 전초기지 ‘KAIST 개방형 양자팹’ 첫 삽 양자 산업화 전초기지 ‘KAIST 개방형 양자팹’ 첫 삽

  • 강추위에 맞선 출근길 강추위에 맞선 출근길

  • 고사리 손으로 ‘쏙’…구세군 자선냄비 모금 시작 고사리 손으로 ‘쏙’…구세군 자선냄비 모금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