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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선 고속도로 비가 내린다 ~ 이 몸 실은 차창가에 부딪혀 흘러 내린다 ~ 경상도길 충청도길 비 내리는 천안 삼거리 ~ 장대같이 쏟아지는 비는 떠난 임에 눈물인가 ~”
1960년대 한국의 가요계를 풍미했던 가수 배호의 히트곡 <비 내리는 경부선>이다. 이밖에도 ‘돌아가는 삼각지’와 ‘누가 울어’, 그리고 ‘안개 낀 장충단공원’이 연속하여 히트하면서 톱 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1971년에 ‘마지막 잎새’를 유작으로 남기고 그 잎새처럼 이 세상을 떠났다. 그날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것도 아침부터! 그래서 소년은 반가웠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창을 열어 비가 내리는 걸 확인한 소년은 아침밥도 거른 채 역전을 향해 달렸다.
이윽고 눈에 가득 담겨져 정겹기까지 한 천안역의 모습이 보였다. 소년은 그쯤에서 발길을 오른쪽으로 돌려 천안역 앞 공설시장으로 들어섰다. 비를 맞아 후줄근해진 소년은 이에 아랑곳 않고 우산 도매상으로 갔다.“우산 열 개 주세유.”
그날처럼 비가 아침부터 축복처럼 많이 쏟아지는 날엔 예상하건대 우산을 열 개 단위로 묶은 모개(죄다 한데 묶은 수효) 서너 개 쯤, 즉 30~40개는 족히 팔수 있을 듯 보였다. 하지만 본디 가난한 소년에겐 그만큼을 한꺼번에 구입할 수 있는 돈이 없었다.
따라서 우선 열 개의 우산부터 판 다음에 그걸 다시금 종잣돈 삼아 다시 우산을 떼러 오면 되는 것이었다. 소년의 예상은 적중했다. 총알보다 빨리 천안역 앞으로 달려가니 열차에서 내린 승객들의 대부분은 쏟아지는 비에 역사를 나오지 못 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소년은 신이 나서 소리쳤다. “우산 있어유, 우산이 50 원이유~” 사람들은 자신부터 먼저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우산 열 개는 순식간에 다 팔렸다. 300 원을 주고 산 열 개의 우산은 금세 500 원이 되었고 그 500 원을 모두 투자하여 소년은 우산을 다시 도매상에서 구입해 팔았다.
그날은 운이 좋아 비가 오전 내내 내렸다. 그래서 소년은 그날 얼추 50개에 육박하는 우산을 팔 수 있는 그야말로 횡재(橫財)의 날이 되었다. 하루 종일 땅을 파도 동전 한 푼 줍지 못 했던 그 삭막한 시절에 모처럼 거금을 번 소년은 자못 의기양양했다.
그랬다. 당시의 소년이었던 나는 병이 드신 홀아버지를 모시고 애면글면 어렵게 살면서 고군분투의 삶과 씨름을 하던 소년가장이었던 것이다. 입학금조차 없어서 중학교라곤 문턱도 밟아본 적이 없는 소년은 공부보다는 홀아버지와 먹고 사는 일이 더 급했던 것이다.
참 고마운 비 덕분에 두둑해진 주머니를 연신 쓰다듬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소년의 발걸음은 소풍을 가는 것처럼 낭창낭창했다. 재빼기를 넘으니 구멍가게와 푸줏간도 보였다. 소년은 거기서 아버지 드릴 소주와 돼지고기도 한 근을 샀다.
병색이 완연함에도 이 아들이 우산을 판 돈으로 사온 소주와 돼지고기에 모처럼 아버지의 미간도 무지개인 양 밝아지셨다. ‘아부지, 건강하셔유!!’비가 오지 않는 뙤약볕의 한여름에는 역전에서 천안삼거리까지 걸어 다니며 아이스케키를 팔았다.
<비 내리는 경부선> 가요의 가사에도 등장하지만 경부선 고속도로를 달리자면 ‘천안 삼거리’를 경유하게 된다. 천안은 고려 태조 왕건의 후삼국통일 병참기지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 고을이 편안해야 천하가 평안해진다는 왕건의 말에 따라 천안도독부가 설치되면서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됐다고 전해진다. 천안삼거리는 또한 조선시대부터 한양에서 경상도와 전라도로 내려가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때문에 과거의 이 지역은 전국에서 몰려드는 사람들도 흥청거렸다고 전해진다. 천안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면 천안삼거리까지 가서 막걸리로 목을 축이는 경우도 잦다. 세월은 여류하여 내년이면 내 나이도 어느새 ‘6학년’이다.
아버지께선 너무도 일찍 이 세상을 버리셨다. 아침부터 비가 쏟아졌다. 창을 여니 저만치의 하늘에서 당시의 기억을 상기시키려는 듯 먹구름을 더욱 크게 만들어내고 있었다.
홍경석 / <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월간 오늘의 한국> 대전·충청 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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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