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는 삶의 축] 138. 흐린 기억 속의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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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는 삶의 축] 138. 흐린 기억 속의 그대

<서평> 우리가 사랑한 한국 소설의 첫 문장

  • 승인 2017-05-23 00:01
  • 홍경석홍경석


“삶이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절망의 텍스트다. 나는 오늘 이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나는 텍스트 그 자체를 거부하였다.” 양귀자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의 첫 문장이다.

‘첫’과 ‘처음’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순간, 막막해진다. 마치 생면부지의 채권자를 만난 채무자의 입장인 양 그렇게. 글을 쓰는 이들, 특히 소설가들의 첫 문장은 남다른 품격까지를 자랑한다. 따라서 그들이 쓴 소설의 첫 문장을 접하는 순간의 묘미와 압권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 된다.

때문에 ‘우리가 사랑한 한국 소설의 첫 문장’(김규회 엮음/끌리는 책 발간)은 이 책의 표지 하단에 다음과 같은 부제를 달았다. - 소설가는 첫 문장을 쓰기 위해 밤을 지새우고, 독자는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밤잠을 설친다! -

한데 가히 촌철살인의 명구인 이 한 줄의 명문 역시 저자의 심사숙고 끝에 탄생한 또 하나의 텍스트(text)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50인의 작품 50개 첫 문장이 때론 수채화처럼, 또 때론 전율할 정도로 끔찍하게 다가와 독자의 폐부에 박힌다.

저자는 여기서 “소설에서의 첫 문장은 독자와 처음 만나는 첫 장면이다. (또한) 첫 문장은 책의 흐름을 좌우하는, 소설에서 가장 주목받는 문장 중 하나다”라고 강조한다.

1장 김훈의 『칼의 노래』를 시작으로 2장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지나 3장 박경리의 『토지』, 4장의 김승옥 『무진기행』, 그리고 5장의 『탁류』(채만식) 등에서 채취한 보석 같은 첫 문장은 다음 페이지로 이동하는 독자들을 ‘심쿵하게’ 만든다.

서두에서 양귀자의 작품을 끄집어 낸 것은 그 첫 문장, 그러니까 ‘삶이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절망의 텍스트다’라는 부분이 필자에게도 적용되었다는 사실의 발견이 단초가 되었다.

“안개 빛 조명은 흐트러진 내 몸을 감싸고 ~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나의 모습 이제는 싫어 ~”로 시작되는 현진영의 <흐린 기억 속의 그대>는 자신을 다분히 자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이어지는 “초라한 나의 모습 변화된 생활 속에 너는 잊혀져가고…”와 “내 곁에서 멀리 떠나가 버린 흐린 기억 속에 그대 모습 떠올리고 있네”가 이런 주장의 어떤 방증이다.

이 책에서 다시금 필자의 맘에 돌을 던진 문구는 “어떤 사람들은 열세 살이 되기 전에 이미 앞으로 자신이 알아야 할 어른들 세계의 모든 것을 알았다고 말한다.(중략)”의 이순원 저 『19세』였다. 한참 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에 필자는 그러나 열세 살이 되기도 전부터 소년가장으로 삭풍이 휘몰아치는 풍진 세상으로 떠밀려 나온 때문이다.
방향타 없이 풍랑 속을 항해하고 있는 배처럼, 또한 마치 잠자리채에 걸려든 잠자리처럼 씨줄과 날줄에 걸려들어 꼼짝 못한 지난날(따지고 보면 현재도 불변하지만)의 필자를 보는 입장의 반영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새로운 시도의 일환으로 소설 집필에 도전장을 낸 나에게는 물론이요, 새로이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도 이 책은 분명 어두운 밤바다에서 빛을 발하는 등대의 역할에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왜? 모든 첫 문장은 별이니까!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마냥 술에 취해 비틀거리기만 하는 인생은 ‘흐린 기억 속의 그대’를 촉진할 따름이다. 이런 때일수록 세계 최대 인터넷 기업 구글의 신기술 발표(AI 관련)와 같은 창의적 발상의 패러다임이 필요하지 않을까.

홍경석 / <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월간 오늘의 한국> 대전·충청 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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