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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잘 했던 아들을 방기하고 술만 드시는 아버지가 싫어서 야반도주로 상경했다. 선배의 소개로 철공장에 들어갔으나 산재사고가 빈번하여 더 있을 수 없었다. 백기투항으로 귀가했으나 아버지는 여전했다.
한데 따지고 보면 엄마도 곁을 지켜주지 않는 그런 홀아버지는 나보다 더 측은했다. 세월이 더 지나 방위병으로 입대했다. '똥방위'라며 놀림을 받았지만 꿋꿋이 견뎠다. 전역을 했는데 더 이상 구두를 닦든가 노동을 할 순 없었다.
취직을 결심하고 전봇대의 구인광고를 훑었다. '창립사원 모집'이라는 델 찾아가니 영어회화 교재와 테이프를 판매하는 회사였다. 중학교를 못 갔으니 영어를 알 리 없었지만 왠지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다행히 면접까지 잘 치르고 합격증을 받으니 천하를 다 얻은 듯 했다. 낮엔 영업을 하고 밤에는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친구의 집을 찾아가 영어를 배웠다. 그러한 열정 덕분에 일약 전국 최연소 영업소장으로까지 승진했다.
소장이 되니 관리하는 직원들이 십여 명 되었는데 한 직원이 하루는 대량판매를 목적으로 그만 욕심을 크게 냈다. 종업원이 엄청 많은 대형 식당 사장을 만나선 나를 미국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 소장님으로 소개했단다.
"그러니 소장님이 모 월 모 일 몇 시까지 저랑 그 식당에 가셔서 영어 잘 하는 방법의 강의를 해 주셔야겠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판매를 많이 하고자 꾸민 수작이었기에 하는 수 없이 승낙했다.
그날로부터 우리 회사에서 만든 영어교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금 달달 외웠다. 미국인이 녹음한 회화 테이프 역시 가급적이면 본토 발음에 가깝게끔 따라했다. 이윽고 '결전'의 날,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데 부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반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조차 의식하지 못 할 만큼 나는 당시 혼까지 빠져있었다. 다만 어서 그 지옥 같은 현장에서 탈출하는 게 최대의 소원이었다. 그러자면 강의시간을 최대한 단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약속한 강의가 또 있어서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손을 들며 질문이 쏟아졌다. "어떻게 하면 선생님처럼 영어를 잘 할 수 있을까요?" "네, 그건 이 교재로 공부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임기응변을 무기 삼아 후줄근하게 쏟아지는 곤혹의 땀과 함께 밖으로 냅다 뛰었다. 저녁에 귀사한 직원은 내가 가고 난 뒤에도 식당의 종업원들은 발음까지 훌륭했다며 날 향한 칭찬이 자자했다고 전했다. "말도 안 돼."
세상의 모든 일은 어떤 공통현상이 있는데 그건 처음이라 힘들다는 편견일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생각을 바꾸면 얼마든지 쉽게 풀어나갈 수 있다. 그 관건은 바로 모사재인(謀事在人), 즉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에게 달렸으니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일을 힘써 꾀하여야 함을 이르는 말이다.
고작 초졸 학력의 베이비부머가 오늘날 언론사의 객원 논설위원이 되고 책까지 발간한 작가까지 되었음은 '모사재인'의 힘과, 어떠한 경우에도 피하지 않은 돈키호테 적 무모함 덕분이었다.
그렇긴 하되 이러한 자화자찬의 이면에도 숨은 자탄(咨)과 자학(自虐)이 없는 건 아니다. 그건 바로 때론 '욕쟁이'로 돌변하기도 일쑤라는 사실이다. 평소 술만 취하면 전화를 해 오는 친구가 있다.
한데 이 친구 역시 욕쟁이인 까닭에 멀쩡한 정신에선 전화를 할 리 없다. 얼마 전에도 만취한 친구가 심야에 전화를 해선 마구 욕을 해댔다. 나 또한 반가운 마음에 똑같이 응수(?)했다.
절친한 친구간의 욕에는 사실 적의(敵意)가 없다. 되레 친밀감을 더욱 두텁게 만든다는 요소가 함유된다. 그 친구가 오늘 문자로 "넌 다 좋은데 그놈의 욕 좀 하지 말았음 좋겠다"는 다소 엉뚱한 궤변을 보내왔다.
"사돈 남 말 하네. 죽으면 욕도 술도 다 끊어"라고 답신을 보냈다. '모사재인'과 더불어 돈키호테와 같은 저돌(?突)을 양수겸장으로 삼으며 치열하게 살아왔건만 사는 꼬락서니는 여전히 후줄근하다.
이처럼 세상살이가 마음대로 안 되니까 푸념과 원망의 어떤 지렛대로 욕도 하는 거다. 어쨌거나 친구야, 욕을 할 수 있는 친구라도 있을 때가 좋은 거다. 내 맘 알지? 넌 나의 휴식 같은 친구니까.
"내 좋은 여자 친구는 가끔씩 나를 보며 얘길 해 달라 졸라대고는 하지 ~ 남자들만의 우정이라는 것이 어떤 건지 궁금하다며 말해달라지 ~" 김민우의 <휴식 같은 친구>를 듣는다. 어느덧 한 해의 해넘이인 12월이다. 송년회 때 욕쟁이 친구를 다시 만나고 싶다.
홍경석 / <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월간 오늘의 한국> 대전·충청 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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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