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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프지만 특유의 미성(美聲)이 돋보이는 손시향의 <이별의 종착역>이다. 이 노래는 많은 가수들에 의해 리바이벌 되었는데 최초로 부른 손시향(孫詩鄕)의 노래가 역시 압권이다.
손시향은 1950년대 말 등장한 중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미남형 가수였다. 작곡가 손석우와 콤비를 이루어 많은 곡을 발표했는데 1938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농대를 졸업했다.
경북고 동창인 한국 영화계 최고의 스타 신성일이 가수로 성공한 그에게 자극받아 배우로서의 성공을 다짐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고 전해진다. 1960년 제4회 미스코리아 진(眞)으로 발탁된 손미희자(孫美喜子)가 그의 여동생이며 1960년 이후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마이애미 한인회장까지 지냈다고 한다.
역전이든 터미널이든 거길 가보면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오늘도 어디론가 동동거리며 떠난다. 하지만 떠난다는 것은 목적지, 즉 '종착역'이 있기 마련이다. 결혼하기 전, 딸이 서울서 내려온다고 하면 대전역 내지 버스터미널로 마중을 나갔다. 너무 고왔기에 어려서부터 물고 빨며 키운 녀석은 명실상부 금지옥엽이었다.
이는 지인들도 순순히 인정했다. "예쁜 줄만 알았더니 공부까지?" 딸이 대학원을 졸업하던 날이 기억의 가로등에서 그 빛을 환히 밝힌다. 꽃다발을 사들고 서울대 캠퍼스에 들어섰다. 딸과 어울려 셀카를 찍고 있던 동급생들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왜 웃어요?" 그날 딸과 같이 졸업하는 동급생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어쩜 그렇게 아빠랑 딸이 붕어빵처럼 똑같아요!" 그럼 다른 사람 닮았으면 어찌 감히 내 딸이랄 수 있겠소?
그 동급생들은 이후 딸이 서울대 연구공원 웨딩홀에서 결혼식을 올렸을 때 역시도 모두 와서 사진까지 함께 찍었다. 그처럼 딸이 행복의 애드벌룬에 올라타 웃음을 남발할 때 나는 잠시 생각이 그 시절 고향역으로 이동했다.
그날 역시도 역전은 분주했다. 아무리 살기 힘들었던 시절이었다곤 하되 객지서 사는 자녀들에게 주고자 바리바리 짐을 등에 진 노부부는 부리부리 기운이 넘쳤다. 우르르 몰려나오는 승객들의 무리에서 제발 울 엄마도 모습을 보였으면 하는 간절함은 여전한 소원이었다.
하지만 그건 언제나 그렇게 공염불이었고 '사람들은 오가는데 그 이만은 왜 못 오나!'의 반복이자 금세 사라지는 신기루일 따름이었다. 그렇게 사무치던 모정에 대한 그리움과 라티푼디움(latifundium)的인 무수한 욕망은 언제부턴가 허우룩의 빈집으로 바뀌었다.
현실을 인정하자 비로소 마음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그로부터 비록 작위적이나마 흰여울의 성정으로 오늘에 최선을 다하자고 맘을 다잡았다. 이후 아들과 딸을 보자 슬픔과 아픔은 해지개(해가 서쪽 지평선이나 산너머로 넘어가는 곳)로 꼴깍 넘어갔다.
오랜 기간 가슴을 멍들게 했던 트라우마까지 이별의 종착역에 닿게 해주었다. 누군가 이르길 대학 재학 기간은 자신의 향후 계급을 저울질하는 시기라고 했다. 곧 해가 바뀐다. 신년은 자신의 앞날을 다시금 저울질하는 기간이다.
새해에 나는 물론이거니와 우리 사회에도 초만영어(草滿囹圄), 즉 나라의 정치와 경제까지 잘 이루어져서 감옥에 죄수가 없는 것처럼 함포고복(含哺鼓腹)의 찰진 국가와 가정이 되길 소망한다.
반목질시(反目嫉視)가 사라지고 사랑과 배려라는 '종착역'이 그 자리를 채운다면 까치놀처럼 반짝이는 삽상의 시원함은 상상만으로도 족히 너분너분의 잉박선이 되고도 남을 것이리라.
홍경석 / <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월간 오늘의 한국> 대전·충청 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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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는 삶의 축]을 마치며
안녕하십니까? 지금 시간은 새벽 3시. 경비원스럽게 어둠과 적막이 점령한 회사의 1층 안내데스크를 야근으로 사수하며 이 글을 씁니다. 먼저, 그동안 집필했던 본 [가요는 삶의 축] 320화 '이별의 종착역'을 탈고하며 나름 '대장정'이었던 이 칼럼의 연재를 마치고자 합니다.
성원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돌이켜 보니 얼추 1년 가까이 달려온 마라톤이었네요. 많이 부족한 글이었고 때론 마치 블로그인 양 방향타를 잃은 적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랬음에도 스스로 면죄부를 줄 수 있었던 건, 그 어떤 것과 곳에도 종속되지 않았고 강요된 부채의식 역시 전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탈고'는 두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탈고(脫稿)는 원고 쓰기를 마침입니다. 따라서 시원하네요. 또 하나는 탈고(脫苦), 즉 글을 쓰는 괴로움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입니다.
작가든 기자든 글을 쓰는 이들에겐 한결같은 고민이 있습니다. 그건 어제보다 오늘의 글이 더 멋지고, 기왕이면 감동을 주기까지 하는 글을 쓰자는 것입니다. 한데 그 과정이 실로 지난하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도사리고 있죠.
또한 글을 쓰자면 사전을 반드시 확인하면서 중언부언과 아울러 겹치는 낱말과 표현은 없는지 역시도 눈이 빠져라 살펴야 합니다. 단락이 너무 길면 식상하므로 이 또한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죠.
재작년에 처음으로 저서를 발간한 적이 있습니다. 한 권의 책을 만들 때 들인 집필엔 석 달이 걸리더군요. 하지만 수정과 교정 등을 보는 건 그보다 두 배 정도 더 걸렸습니다. 그랬음에도 돌아서면 어느새 잡초처럼 불쑥 솟아나 있는 오기(誤記)엔 정말이지 미치고 팔딱 뛸 지경이더군요.
책이란, 신문이란 그처럼 글자 하나조차도 실로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사람들은 책(종이신문)을 안 봐도 너무 안 보는 경향이지 싶습니다. 남녀노소 모두 스마트폰에 포로가 되어 속박돼 있는 모습을 보자면 안타깝기 그지없더군요. 어쨌거나 [가요는 삶의 축]의 집필기간 중에 적지 않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사랑하는 아들이 참한 며느릿감과 집에 온 '낭보'가 가장 먼저 떠오르네요. 자타공인의 효자인 아들처럼 부창부수인 양 며느리 역시 효녀 심청의 반의 반만 닮아도 좋겠습니다. 딸과 사위의 불변한 부부애 역시 우리 부부를 웃음 짓게 하는 빛나는 보석입니다.
다음으론 다양한 언론과 기관 등지에의 기고와 집필, 그리고 의미가 남다른 모 문학상의 수상입니다. 제가 칼럼에서도 누차 강조했듯 가족 간의 도타운 사랑이 오늘날의 저를 만들어준 일등공신입니다.
그 사랑이 없었다면 저는 일개 무지렁이로 존재감조차 상실한 채 더욱 확실하게 표류하면서 늙기만 했을 겁니다. 그동안 이 글을 써 오면서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항상 부족한 저에게 용기와 함께 이 글의 연재를 허락해주신 중도일보사 관계자님들께 거듭 심심한 감사말씀 올립니다.
새로이 시작하는 소생의 연재 칼럼에도 배전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고통과 슬픔, 아픔과 절망 따위 모두를 각자의 무술(武術)로 타개하시며 더 좋은 행운 가득의 2018년 무술년이 되시길 응원합니다. 고맙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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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