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 언어 사대주의가 만든 트램의 환상

  • 오피니언
  • 풍경소리

[풍경소리] 언어 사대주의가 만든 트램의 환상

송기한 대전대 교수

  • 승인 2026-01-26 10:17
  • 신문게재 2026-01-27 19면
  • 조훈희 기자조훈희 기자
송기한 대전대 교수
송기한 대전대 교수
큰 것을 선호하는 한국인의 취향 중에는 언어 사대주의라는 것이 있다. 큰 나라의 언어들을 사용함으로써 지식의 높낮이나 교양의 수준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이 주의의 핵심이다. 일찍이 한자가, 일본어가 그러했다. 이제는 영어가 교양의 수준을, 세련성의 수준을 가장 높여주는 언어로 자리 잡은지 오래다.

정지용은 자신의 작품에 외래어를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시의 현대성을 확보한 시인이다. 가령, '카페 프란스'라는 제목으로 루바쉬카(러시아풍의 셔츠)라든가 페이브먼트(도로) 등의 시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시가 전통적인 시조나 민요와 구분시킨, 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근대 초기의 작가들이 예술의 현대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외래어를 도입하는 수법을 엑조티시즘(exoticism)이라고 지칭됐다.

지금 대전 시내에는 트램(tram) 공사가 한창이다. 그에 따른 교통 불편은 덤으로 따라오고 있다. 이것이 대전 지하철 2호선 트램이란다. 비슷한 규모의 광주시는 2호선 공사가 끝나고 지상의 노면을 모두 덮었다고, 그래서 깨끗하고 넓은 예전 도로의 모습대로 회복됐다고 한다. 그리고 대전보다 약간 큰, 자매도시인 일본 삿포로에도 3개 노선의 지하철이 건설돼 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

처음 트램이 건설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전차가 아니냐고?", "전차를 21세기 현대화된 도시에 왜 설치하느냐?", "교통을 방해하는 주범으로 이미 철거된 운명을 맞지 않았느냐?"고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그랬더니 옆에 앉은 분이 바로 답을 줬다. "유럽은 트램이 대세래요"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이 말에 대한 적절한 응대가 떠오르지 않았다. 유럽을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이에 대해 말을 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생각은 지워지지 않았다. 중국, 일본, 미국을 닮고자 하더니 이제 그 모방의 대상이 유럽인가.

이런 의문이 있던 차에 지난 여름 서유럽과 동유럽을 15일 정도 방문할 기회가 있었고, 이곳의 교통 체계에 대해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됐다. 유럽에 많은 트램이 운행했고, 또 도시의 주요 교통수단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트램이 유럽에 필요불가결한 교통수단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다. 대부분의 트램들은 근대 초기에 건설된 것이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용되고 있었던 것인데 이는 유럽 도시들의 특성을 알게 되면 충분히 납득될 수 있는 일이다. 유럽은 중세 시대의 건축 문화재가 많고, 따라서 자동차를 운행하기 위해 도로를 넓히기 어려운 현실적 조건에 놓여 있었다. 그러한 한계를 보족하기 위해서 이미 건설된 트램을 계속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트램은 그저 전차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전차라고 하면 구시대적인 느낌을 주고, 트램이라고 하면 21세기 최첨단의 교통수단이 되는 것인가. 언어 사대주의는 우리를, 사회를 미혹시켜 왔다. 이런 사례들은 우리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20세기 초 최첨단의 시를 쓴 이상이 '제비다방'을 창업했지만 실패했다. 그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 사대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상호를 '버드 카페'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사랑하는 기생 금홍이와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언어 사대주의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마력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통신 혁명으로 불리던 이동통신의 경우가 그러하다. 이동통신이 처음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이다. 몸에 지니면서 전화를 걸고 받을 수 있는 일들이 대중에게 얼마나 신선한 충격을 주었는지는 이를 경험한 세대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이 휴대전화를 개발한 기업은 삼성과 엘지였다. 삼성은 휴대폰의 이름을 애니콜(anycall)이라고 했고, 엘지는 화통(話通)이라고 했다. 의미는 동일하나 대중에게 호소하는 효과는 하늘과 땅 차이로 받아들여졌다. 언어 사대주의에서 밀린 엘지 휴대폰의 운명은 이미 탄생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고 봐야 한다. 트램이 전차임을 시장은 이미 알고 있는 듯하다. 만약 트램이라면 정차역 주변의 부동산값은 벌써 불기둥을 이뤘을 것이다. 그런데 고드름처럼 차갑게 그저 매달려 있지 않은가. /송기한 대전대 교수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당진시, 고추 병해충 방제 '골든타임'…예찰·방제 당부
  2. 라미드그룹, 천안 골드힐카운티리조트 관광단지 내 국제수준 5성급 호텔 개발 본격화
  3. '송영길 후보' 승부수, "행정수도특별법 당론 통과" 확약
  4. 세종 신라스테이까지 공매로…"깊어진 상권 침체의 늪"
  5. 예산군, 계룡아파트 일원 도로 확장 본격화…병목 해소 기대
  1. 대전 공공기관에 정보공개 청구해봤더니… 같은 질문에도 제각각 답변
  2. [WHY이슈현장] 기관명은 대전중수청, 첫발은 세종에서…수사 효율 쟁점
  3. [WHY이슈현장] 자치경찰제 시행과 엇갈린 개편, 지역 자율성은 축소 우려
  4. 세종 '행정수도법' 통과 힘 받는다… 국회의장까지 '합심'
  5. 대전 선도지구 선정 구역들, 향후 절차와 계획은?

헤드라인 뉴스


"행정수도법 연내 제정" 세종시민사회 대책위가 이끈다

"행정수도법 연내 제정" 세종시민사회 대책위가 이끈다

"역사는 기회가 왔다고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민이 움직일 때 역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2002년 신행정수도 건설이 국가적 의제가 됐던 것도 국민의 염원과 참여가 있었기 때문이며, 오늘의 세종시 역시 시민들의 헌신과 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연대가 시작돼야 합니다." 29일 '행정수도특별법 제정을 위한 시민사회 비상연석회의'가 열린 세종시청 대회의실에서 황치환 범국민대책위원회 준비위원장은 이같이 선언했다. 이 선언을 시작으로 행정수도특별법 연내 제정을 위한 시민들의 결집이 공식화됐다. 내달 출범..

교육열 높은 세종, 학업 중단율도 전국 최고… 왜?
교육열 높은 세종, 학업 중단율도 전국 최고… 왜?

세종시 고등학생의 학업 중단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도권에 버금가는 교육열과 학생 수 증가에도 불구하고 자퇴생이 매년 늘면서, 세종의 교육환경과 지역 특성을 반영한 맞춤형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2028학년도 대입제도 개편에 따른 내신 5등급제 전환으로 '전략적 학업 중단' 현상이 확산하면서, 학업 중단율이 더욱 높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29일 세종시교육청에 따르면 2025년 기준 세종시 고등학교 자퇴생은 332명으로, 전체..

박수현 충남지사, 김민석에 "공공기관 2차 이전·발전본사 유치" 전폭 지원 요청
박수현 충남지사, 김민석에 "공공기관 2차 이전·발전본사 유치" 전폭 지원 요청

박수현 충남지사가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선거에 출마한 김민석 후보를 만나 수도권 공공기관 2차 이전과 발전공기업 통합본사 유치 등 충남 지역 현안을 전달하고 당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박 지사는 29일 도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민석 후보는 당대표 후보 중 유일하게 면담을 요청해 온 인물"이라며 김 후보와의 면담 사실을 밝히고, 2차 공공기관 이전과 발전공기업 통합본사의 충남 설치 필요성을 적극 설명했다고 전했다. 박 지사는 세종시 출범으로 인한 충남의 상대적 손실과 내포신도시의 정체 상황을 강조했다. 그는 "..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더위 조심하세요’ ‘더위 조심하세요’

  • ‘여름 휴가 떠납니다’ ‘여름 휴가 떠납니다’

  • 폭염에 달궈진 도로 식히는 살수차 폭염에 달궈진 도로 식히는 살수차

  •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권리당원 투표 시작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권리당원 투표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