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人] 단재 - 단장의 아픔, 의연함

  • 오피니언
  • 문화人 칼럼

[문화人] 단재 - 단장의 아픔, 의연함

  • 승인 2021-06-30 16:21
  • 신문게재 2021-07-01 19면
  • 한세화 기자한세화 기자
2021050401010001510
송 전 한남대 명예교수, 공연예술학
단재 신채호는 민족의 아픔을 온몸으로 담아낸 대전 출신의 지사이자 역사가, 작가이다. 그의 '조선상고사'는 고려 초기의 신라 계열 문인이었던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드러낸 사대주의를 통렬히 비판하고 있지만, 정통 사학의 흐름 안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형편이다. 그의 삶과 투쟁, 흔적은 말 그대로 '재야적(在野的)'이다.

최근 단재를 그린 연극 '산책'(신성우 작, 한선덕 연출, 극단 새벽, 2021. 6. 10~12 대덕문예회관, 6.17~26 드림아트 홀) 한 편이 무대에 올랐다. 이 작품은 2020년 대전창작희곡상에 선정된 세 작품 중의 하나로, 단재의 인생행로를 전체적으로 포착하려고 했기에 서사적 넓이를 갖고 있는 작품이다. 단재가 경술국치년 이후 언론 활동을 통해 무장 독립투쟁을 주장하며 온건 타협적이었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 외톨이가 되었던 상황, 그로 인해 보다 분명한 반일 투쟁의 노선을 정립하기 위한 역사서 집필을 위해 만주로 옮아가려는 모습, 3.1 만세 운동을 지식인 시각이 아닌 민중의 시각에서 인지하려는 태도, 폭력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을 위해 의열단의 김원봉과 접촉하는 모습, 만주 뤼순 감옥생활 등이 작품의 중요 장면들이다.

작품의 흐름 안에서 중심은 단재(이동규 분)와 박자혜(이여진 분)와의 관계이다. 두 사람은 결혼에 이르기 전 북경의 한 공원에서 산책을 하며 사랑을 일구었는데, 두 사람의 생에서 유일하게 행복감을 공유한 시간이었다. 작품은 그 사랑의 시간이 그 뒤에 이어질 고난의 세월에 비교해서 얼마나 애절하게 귀한 시간이었는지 그리고 자혜가 독립투사의 아내로 두 아들을 배고픔 속에서 키워내며 얼마나 또 한 번 잠시라도 함께하고 싶어 했던 순간인지를 보여 줌으로써 가정과 사랑을 포기해야 했던 단재의 투쟁의 아픔을 전달하려 한다.

박자혜는 원래 궁정 나인이었으나 한일합방 이후 궁정이 해체되면서 방출된 후 신교육의 흐름에 동참하여 간호사가 된 여성이다. 그는 3.1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가 고문까지 당하는 혹심한 투옥 생활을 마친 뒤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에서 의대를 다니며 항일투쟁에 나선 야무진 여성이었다. 당시 중국 독립운동의 중심인물 이회영의 주선으로 이혼 상태의 단재와 만나게 되어 그와 결혼을 하게 된다. 중국 내 국제 아나키스 그룹과 연계되기 시작한 단재는 다혜와 짧은 망중한을 거치 뒤 투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만으로 갔다가 거기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만주국으로 끌려갔다.



단재는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 타자)와의 투쟁의 기록이다'라고 말한다. 외부와 타자의 강압에 의해 자신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자신의 역량을 키워 저항하며 쓰는 기록이 역사라는 것이다. 그는 당시 무력으로 조선을 강점하는 일제에 무장폭력 투쟁을 벌여야 한단 입장이었고 그렇기에 김원봉의 의열단과 손을 잡고 조선혁명선언문을 쓰기도 했다.

이런 비아(非我)와의 투쟁에는 명백한 외부의 다른 존재뿐만 아니라, 내 안의 또 다른 나와의 투쟁까지를 포함한다. 후자의 경우엔 전자의 그것 보다 훨씬 더 깊은 고통이 따른다. 혹심한 뤼순의 투옥 생활에 중병이 든 단재를 일제는 보석을 통해 방출하려 한다. 이에 필요한 보증 서줄 인척도 있다며, 박혜자는 단 한 번만 타협해 달라고, 단 한 번만 아버지 역할을 해달라고. 단재에게 눈물로 애원한다. 하지만 그는 그 인척이 이미 친일분자가 되었기에 보석을 거부한다. 그의 도움으로 보석 석방이 될 경우 세인들이 자신의 글과 말을 부정할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공적 차원이나 역사의 차원이 아닌 극히 사적인 차원의 일이었지만. 자신의 글과 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뿌리를 자른 것이었다. 매몰차게 아내의 애소를 떨치고 자식 사랑을 끊는 그는 단장의 아픔을 느꼈을 것이다. 서슬 퍼런 엄정함이다. 이동규와 이여진은 이번 공연에서 두 사람의 애절한 사랑과 고통을 절박하게 드러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연출도 마구 흐트러질 수 있는 장면들을 적절히 잘 꿰매고 있다. 다만 애틋한 사랑이 담긴 '산책'의 장면을 극장 구조와 생산 코스트 때문에 선명히 드러내지 못한 것은 아쉬웠다. 연극을 읽으며 요즈음 국가 운영의 정치적 중립을 견지했어야 할 인사들이 권력욕을 위해 변신하는 모습을 보며 단재의 의연함을 새롭게 떠올린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갑천 야경즐기며 워킹' 대전달빛걷기대회 5월 10일 개막
  2. 수도 서울의 높은 벽...'세종시=행정수도' 골든타임 놓치나
  3. 충남 미래신산업 국가산단 윤곽… "환황해권 수소에너지 메카로"
  4. 이상철 항우연 원장 "한화에어로 지재권 갈등 원만하게 협의"
  5. [근로자의 날] 작업복에 묻은 노동자 하루…"고된 흔적 싹 없애드려요"
  1. 충청권 학생 10명 중 3명이 '비만'… 세종 비만도 전국서 가장 낮아
  2. 대학 10곳중 7곳 올해 등록금 올려... 평균 710만원·의학계열 1016만원 ↑
  3. 함께 새마을, 미래로! 세계로!
  4. [춘하추동]삶이 힘든 사람들을 위하여
  5. 2025 세종 한우축제 개최...맛과 가격, 영양 모두 잡는다

헤드라인 뉴스


[근로자의 날] 작업복에 묻은 노동자 하루…"고된 흔적 싹 없애드려요"

[근로자의 날] 작업복에 묻은 노동자 하루…"고된 흔적 싹 없애드려요"

"이제는 작업복만 봐도 이 사람의 삶을 알 수 있어요." 28일 오전 9시께 매일 고된 노동의 흔적을 깨끗이 없애주는 세탁소. 커다란 세탁기 3대가 쉴 틈 없이 돌아가고 노동자 작업복 100여 벌이 세탁기 안에서 시원하게 묵은 때를 씻어낼 때, 세탁소 근로자 고모(53)씨는 이같이 말했다. 이곳은 대전 대덕구 대화동에서 4년째 운영 중인 노동자 작업복 전문 세탁소 '덕구클리닝'. 대덕산업단지 공장 근로자 등 생산·기술직 노동자들이 이용하는 곳으로 일반 세탁으로는 지우기 힘든 기름, 분진 등으로 때가 탄 작업복을 대상으로 세탁한다...

`운명의 9연전`…한화이글스 선두권 경쟁 돌입
'운명의 9연전'…한화이글스 선두권 경쟁 돌입

올 시즌 절정의 기량을 선보이는 프로야구 한화이글스가 9연전을 통해 리그 선두권 경쟁에 돌입한다. 한국프로야구 10개 구단은 29일부터 다음 달 7일까지 '휴식 없는 9연전'을 펼친다. KBO리그는 통상적으로 잔여 경기 편성 기간 전에는 월요일에 경기를 치르지 않지만, 5월 5일 어린이날에는 프로야구 5경기가 편성했다. 휴식일로 예정된 건 사흘 후인 8일이다. 9연전에서 가장 주목하는 경기는 29일부터 5월 1일까지 대전 한화생명볼파크에서 열리는 LG 트윈스와 승부다. 리그 1위와 3위의 맞대결인 만큼, 순위표 상단이 한순간에 뒤바..

학교서 흉기 난동 "학생·학부모 불안"…교원단체 "재발방지 대책"
학교서 흉기 난동 "학생·학부모 불안"…교원단체 "재발방지 대책"

학생이 교직원과 시민을 상대로 흉기 난동을 부리고, 교사가 어린 학생을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학생·학부모는 물론 교사들까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경찰과 충북교육청에 따르면 28일 오전 8시 33분쯤 청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특수교육대상 2학년 A(18) 군이 교장을 비롯한 교직원 4명과 행인 2명에게 흉기를 휘둘러 A 군을 포함한 모두 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경계성 지능을 가진 이 학생은 특수교육 대상이지만, 학부모 요구로 일반학급에서 공부해 왔다. 가해 학생은 사건 당일 평소보다 일찍 학교에 도착해 특..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2025 유성온천 문화축제 5월 2일 개막 2025 유성온천 문화축제 5월 2일 개막

  • 오색 연등에 비는 소원 오색 연등에 비는 소원

  • ‘꼭 일하고 싶습니다’ ‘꼭 일하고 싶습니다’

  • 함께 새마을, 미래로! 세계로! 함께 새마을, 미래로! 세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