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광장] 표준화된 생애여 안녕!

  • 오피니언
  • 목요광장

[목요광장] 표준화된 생애여 안녕!

류유선 대전세종연구원 책임연구위원

  • 승인 2023-06-28 09:03
  • 심효준 기자심효준 기자
2023050401000335500013381
류유선 책임연구위원.
청년이면 누구나 경험한다고 여겨지던 '취업-연애-결혼-출산'이라는 표준화된 생애과정은 더이상 한국에서는 작동하지 않는 듯하다. 사회적 독립과정에서 청년 다수가 거쳤던 결혼 이벤트나 출산이라는 통과의례는 할 수 있는 사람만 하는 '선택'사항이 되고 있다. 좋은 일자리에 취업하면 연애와 결혼 가능성이 커지고 안정적 주거 형태를 가지면 결혼과 출산을 결정하기 쉬운 상태 말이다.

'취준생'이라는 명칭은 오래전에 생겼고, 높은 청년실업률이 이를 뒷받침한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라는 조건은 취업을 해도 번아웃되거나 질병으로 일을 그만두는 '취업과 퇴사'라는 노동서사를 반복하는 청년의 증가가 그러하고, 결혼 전 경력단절여성에 합류하는 청년 여성의 증가도 그러하다. 연애나 결혼이 산업이 된 것도 그러하다. 연애를 포기하는 청년도, 결혼 대신 비혼을, 결혼해도 무자녀를 선택하는 청년의 증가도 그러하다.

자신의 생존도 책임지기 어려운 '각자도생'의 시대에 가족을 만든다는 것은 제 발로 빈곤층으로 걸어가는 것이라고 인식하는 청년에게 '결혼할 나이' 혹은 부부와 자녀로 이뤄진 '정상가족'은 실천하기 어려운 인생의 과업이고, 노후의 불안과 빈곤을 예상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물론 좋은 일자리 취업과 살만한 전셋집(자가는 어렵고 월세는 벗어난) 마련 또한 힘든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인구절벽이나 지방소멸이니 하는 협박성 언어들이 정책영역에 마구잡이로 통용되면서,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아 지역을 떠나면 떠난다고, 결혼을 못하면 안 한다고, 자녀를 출산하지 않으면 안 한다는 비난을 온몸으로 받고 있다. 청년들이 누구를 보살피고, 돌보며, 책임지는 관계를 갖기를 희망한다는 것은 무모한 사회의 바람인데도 말이다.

대전의 한 대학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P 씨는 30대 중반 남성이다. 논문 주제를 검토하고 관련 책을 읽기도 바쁘지만 생활비를 위해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박사 학위가 일자리 보장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법적 청년인 39세가 가까워질수록, P 씨 걱정은 학자금 대출 이자보다 높은 비율로 불어나고 있다. 이대로는 취업도, 연애도, 결혼도 모두 안 될 거 같다.

공공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H 씨는 30대 중반 여성이다. 정규직이지만, 무늬만 정규직인 무기계약직이다. 정규직과는 급여나 다른 근로조건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다. 알면서 모른 척하고 몰라서 참는 것도 많다. 잘리진 않겠지만, 정년까지 일한다고 해서 노후가 보장될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 일은 많고 급여는 적다. H 씨는 운 좋게 주변 시세보다 저렴한 청년임대주택에 선정되어 거주하고 있다. 39세가 넘으면 '청년'임대에서 '국민'임대로 바꿔야 할 것 같다. 임대주택을 벗어나기 쉽지 않아 보인다.

Y 씨는 30대 후반의 맞벌이 부부다. 옆 아파트에 사시는 부모님이 없으면 부부 가운데 하나는 직장을 다닐 수 없다. 아마도 그건 남편보다 임금이 적은 Y 씨의 몫일 것이다. Y 씨는 경력단절여성이 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육아시간을 쓰며 엄마 심기를 살피고 아버지의 만성적 허리통증이 심해지는지도 점검해야 한다. 사시사철 언제 아이에게 올지 모르는 감기도 대비해야 하고 배우자의 야근과 아이의 방학, Y 씨의 쌓이는 업무 등을 예측 가능하게 관리해야만 경력을 지속할 수 있다. 직감과 눈치까지 동원해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부모님과 배우자, 아이 모두의 협력이 필요한 사안인데, 누구 하나 삐끗하면 가족의 일상이 무너지고 마는,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종합적이고 기술적으로 집안을 경영하는 이가 바로 일하는 엄마, Y 씨다. 일하면서 이런 육아와 돌봄을 경험하고 있는 Y씨가 둘째를 계획한다는 것은 제정신이면 할 수 없는 결정이다.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은 깨졌고, '가장 아버지 + 전업주부 엄마'라는 가족 공식도 무너졌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일해야만 가족이 유지되는 사회다. 1인 가구 증가가 새롭지 않은 이유다. 학교를 졸업하면 취업하고, 연애하다 결혼하고, 결혼하면 출산하는 사회는 이제 없다. 원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 청년들이 발 딛고 있는 사회가 그렇다. 취업도,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불가능한 사회를 만든 것은 청년이 아니다.

/류유선 대전세종연구원 책임연구위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KTX 세종선·CTX 연장' 충청권 합의로 새 국면
  2. 서산 지곡면에 '문화예술 새 거점' 들어선다, 내포-서산 창작예술촌 건립 속도
  3. 천안시, 원성커뮤니티센터 건축설계 최종보고회 개최
  4. 장기수 천안시장, 복지현장서 폭염 대비 안전점검
  5. 천안시, 민선 9기 출범 맞춰 안전·보건경영방침 개정
  1. 與 당권주자, 지역 현안 실종된 순회경선에 비판 고조
  2. 남서울대, 롯데마트 성정점서 탄소중립 조형물 전시회 성료
  3. 천안시청공무원노동조합, 이색 청렴 캠페인 전개
  4. 천안시, 'K-컬처박람회' 앞두고 선제적 방역소독 총력
  5. 천안문화재단, 하반기 삼거리·서북갤러리 전시 개최

헤드라인 뉴스


폭염보다 더 힘든 희망고문…대전 쪽방촌 개발사업 또 표류하나

폭염보다 더 힘든 희망고문…대전 쪽방촌 개발사업 또 표류하나

연일 체감온도 33도 이상 불볕더위에 대전에서 폭염특보가 발효 중인 가운데, 정동 쪽방 주민들은 폭염보다 더 힘든 희망고문에 시달리고 있다. 주거 취약계층 지원과 역세권 정비를 위한 이곳 쪽방촌 공공개발 사업이 지난해 9월 2년 반 만에 기본조사가 재개돼 기대감을 모았으나 최근 완공 시점이 2032년으로 변경된 데다 여전히 토지건물주 이견에 벽을 넘지 못해서다. <중도일보 2025년 1월 14·20·21·23일 자, 7월 9·10일 자, 8월 6일 자 1면 보도 등> 사업시행자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올 연말까지 기본조사를 마친..

서남부터미널 폐업 초읽기… 조속한 교통대책 마련 필요
서남부터미널 폐업 초읽기… 조속한 교통대책 마련 필요

대전 서남부터미널 운영업체의 '경영 악화'로 터미널 폐업이 사실상 불가피해지면서 지자체의 조속한 폐업 결정과 교통대책 마련이 요구된다. 최근 단 하나 남아있던 금남고속마저 '이용객 감소'를 이유로 유성복합터미널로 기점 변경을 신청, 충남도가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가면서 사실상 폐업 초읽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운송업계에선 폐업을 늦추는 것보단, 조속한 이동권 확보 방안 마련이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2일 운송업계 등에 따르면, 최근 금남고속은 충남도에 기점 변경을 신청했다. 금남고속은 도시철도 2호선 트램 공사로 서남부터미널 진입..

금융당국,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품 겨냥 `긴급조치권` 카드 꺼냈다
금융당국,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품 겨냥 '긴급조치권' 카드 꺼냈다

금융당국이 증시를 뒤흔드는 주범으로 지목된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품을 겨냥해 긴급조치권이라는 강도 높은 카드를 꺼내 들었다. 기본예탁금 상향 등을 골자로 하는 보완책에 이어 발표된 추가 대책 일환으로, 글로벌 반도체 종목 쏠림 현상에 레버리지 상품까지 겹쳐 극도로 높아진 시장 변동성을 관리한다는 차원이다. 2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긴급한 상황에서 시장 안정화 조치를 취할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금융감독원과 함께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마련한다. 최근 홍콩의 가변 레버리지 배율 사례를 참조했다. 홍콩 증권선물위원회(SFC)는..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민주당 당대표·최고위원 충청서 순회경선 시작 민주당 당대표·최고위원 충청서 순회경선 시작

  • 북적이는 계곡과 한산한 도심 북적이는 계곡과 한산한 도심

  • 장종태 의원 민주당 대전시당위원장 선출 장종태 의원 민주당 대전시당위원장 선출

  • 과태료 부과 무시한 채 불법광고물 부착 과태료 부과 무시한 채 불법광고물 부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