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홍철 칼럼] 39. '서사의 위기'

  • 오피니언
  • 사외칼럼

[염홍철 칼럼] 39. '서사의 위기'

염홍철 한밭대 명예총장

  • 승인 2023-10-12 12:00
  • 현옥란 기자현옥란 기자
염홍철칼럼
염홍철 한밭대 명예총장
한국 대학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하고 독일에 건너가 철학, 독문학, 그리고 천주교 신학을 공부한 한국계 독일인 한병철 교수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일간지 '엘 파이스'가 "세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살아있는 철학자"라고 극찬한 인물입니다. 그는 그동안 '피로사회', '투명 사회', 그리고 '고통 없는 사회' 등의 저서에서 사회적 병리 현상을 예리한 시각으로 파헤친 바 있으며 이번에 같은 맥락에서 새로운 책 '서사의 위기'를 출판하였습니다.

한병철 교수는 '서사의 위기'에서 현대인은 스토리와 소셜미디어(SNS)에 중독되고 예속되었다고 화두를 던집니다. 저자는 자기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빼앗긴 현 시대를 '서사의 위기'라고 진단한 것입니다. 반짝하다 사라진 스토리는 어떠한 삶의 방향이나 의미도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서사의 위기는 삶의 위기로 직결되지요. 저자는 인간은 한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이동하며 사는 존재가 아니며 "탄생과 죽음 사이의 삶의 전체를 연결하며 자신만의 맥락으로 나아갈 때 의미를 찾을 수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길고 느린 호흡으로 내면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시간은 사실상 없으며 경험과 생각들이 차곡차곡 쌓이지 못하고 정보로 그저 나열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자신은 많이 켕기고 있습니다. 저는 '아침단상' 등 매일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 자체가 문제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여 어떻게 태도 교정을 해야 하는지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책을 빨리 읽고, 빨리 소화하여, 빨리 글을 써야 되기 때문에, 내면의 이야기를 깊이 발굴하고 내 자신의 이야기로 만드는 데에 소홀합니다. '넓고 얕은 지식'을 남발하고 있을 뿐입니다. 책을 세 권 읽는 것보다는 한 권의 책을 세 번 읽고, 더 많은 시간 동안 사색에 집중하는 것이 감흥을 온전히 느낄 터인데, 나 자신을 스스로 정보화하는 데에 더 익숙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병철 교수는 '서사의 위기'를 통해 우리 시대의 재앙이 무엇인지를 밝힘과 동시에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해결책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서사의 회복만이 예측 불가능한 세계에서 불안에 떨지 않고 사는 방법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들이 하는 대로 공허하게 끌려가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맥락으로 고유한 인생, 다른 이야기를 만드는 삶인 것입니다.



이 책에서 서사의 위기 극복 방법으로 '경청'을 강조하고 있지요. 상대방의 말을 사려 깊게 들어줌으로써 스스로 이야기하도록 이끈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고 심지어 사랑받는다는 느낌까지 받게 된다는 것이지요. 즉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서사를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복된 서사는 아픔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발터 벤야민과 한나 아렌트 등을 인용하면서 치유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즉 발터 벤야민은 "환자의 병은 의사에게 증상을 이야기하는 데서 치유가 시작된다"라는 것이고, 한나 아렌트는 "모든 슬픔은 이야기에 담거나 이야기로 해낼 수 있다면 견딜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환자는 스스로 자유롭게 이야기할 때 치유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삶은 이야기이고 이런 이야기에는 새 시작의 힘이 있으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이야기를 전제로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대인에게는 이야기를 경청할 시간과 인내심이 없는 것이지요. 또한 길고 느리게 펼쳐지는 서사의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효율이 오르지 않기 때문이지요. 마치 저의 독서나 글쓰기 습관처럼 말입니다.

염홍철 한밭대 명예총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공사장 관리부실 대전 도마동 골목 물바다…공사장 물막이둑 터져
  2. 논란의 금속보호대 대전교도소 1년간 122회 사용… 기록누락 등 부실도
  3. 이철수 폴리텍 이사장, 대전캠퍼스서 ‘청춘 특강’… 학생 요청으로 성사
  4. 고교학점제 취지 역행…충청권 고교 사교육업체 상담 받기 위해 고액 지불
  5. ‘숭고한 희생 잊지 않겠습니다’
  1. 서울대 10개 만들기·탑티어 교수 정년 예외…교육부 새 국정과제 본격 추진
  2.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대전충청본부, 치매안심센터 찾아 봉사활동
  3. 세종 BRT예정지 미리알고 땅 매입한 행복청 공무원 "사회적 신뢰 훼손"
  4. "치매, 조기진단과 적극적 치료를" 충남대병원 건강강좌
  5. 새 정부 교육 국정과제 '시민교육 강화' 대전교육 취약 분야 강화 기대

헤드라인 뉴스


충남도 5년간 11조 투입해 서해안 수소벨트 구축

충남도 5년간 11조 투입해 서해안 수소벨트 구축

충남도가 석탄화력발전소 밀집 지역인 서해안 일원에 친환경 수소산업 벨트를 구축한다. 도는 수소 생산부터 저장, 활용까지 국내 최대 수소산업 클러스터를 구축해 글로벌 수소 허브로 탈바꿈시킨다는 목표다. 김태흠 지사는 18일 서산 베니키아호텔에서 열린 '제7회 수소에너지 국제포럼'에서 19개 기관·단체·대학·기업과 업무협약을 맺고, 서해안 수소산업 벨트 구축 본격 추진을 선언했다. 이날 포럼에는 김 지사와 제프 로빈슨 주한 호주 대사, 니쉬 칸트 씽 주한 인도 대리 대사, 예스퍼 쿠누센 주한 덴마크 에너지 참사관 등 500여 명이 참석..

불꽃야구, 한밭야구장에서 직관 경기 열린다
불꽃야구, 한밭야구장에서 직관 경기 열린다

리얼 야구 예능 '불꽃야구'가 대전 한밭야구장(대전 FIGHTERS PARK)에서 21일 오후 5시 직관 경기를 갖는다. 18일 대전시에 따르면 이번 경기는 한밭야구장을 불꽃야구 촬영·경기 공간으로 활용하기로 한 협약 이후 시민에게 개방되는 첫 무대다. '불꽃야구'는 레전드 선수들이 꾸린 '불꽃 파이터즈'와 전국 최강 고교야구팀의 맞대결이라는 예능·스포츠 융합 콘텐츠로 주목받고 있다. 21일 경기는 수원 유신고와 경기를 갖는다. 유신고는 2025년 황금사자기 준우승, 봉황대기 4강에 오른 강호로, 현역 못지않은 전직 프로선수들과의..

추석 앞두고 대전 전통시장 찾은 충청권 경제단체장들 "지역경제 숨통 틔운다"
추석 앞두고 대전 전통시장 찾은 충청권 경제단체장들 "지역경제 숨통 틔운다"

충청권 경제 단체들이 추석을 앞두고 대전지역 전통시장을 찾았다. 내수 침체로 활력을 잃은 지역경제에 숨통을 틔우기 위한 캠페인을 위해서다. 특히 이번 캠페인에는 이상천 대전세종중소벤처기업청장이 취임 직후 첫 공식일정으로 민생현장을 찾아 눈길을 끌었다. 대전세종충남경제단체협의회(회장 정태희)는 지난 17일 오전 대전 서구 한민시장에서 '지역경제 활성화 캠페인'을 개최했다. 행사에는 이상천 중기청장을 비롯해 정태희 회장(대전상의 회장), 김석규 대전충남경영자총협회장, 송현옥 한국여성경제인협회 대전지회장, 김왕환 한국무역협회 대전세종충남..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민생회복 소비쿠폰 2차 지급 준비 만전 민생회복 소비쿠폰 2차 지급 준비 만전

  • 2025 적십자 희망나눔 바자회 2025 적십자 희망나눔 바자회

  • 방사능 유출 가정 화랑훈련 방사능 유출 가정 화랑훈련

  • ‘숭고한 희생 잊지 않겠습니다’ ‘숭고한 희생 잊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