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하추동] 녹아 내리는 시계

  • 오피니언
  • 춘하추동

[춘하추동] 녹아 내리는 시계

백향기 대전 창조미술협회 회장

  • 승인 2024-01-02 17:15
  • 신문게재 2024-01-03 18면
  • 임병안 기자임병안 기자
백향기
백향기 대전 창조미술협회 회장
지난 한 해는 정말로 바쁘게 지냈다. 늘 하던 그림 그리고 여러 전시회에 출품하는 일 외에도 몇 가지 직책을 맡게 되어 회의에 참석하고 의견을 제시하고, 평가 하는 등의 다양한 일들이 많았다. 화실에서 그림 그리고 전시하는 화가 본연의 활동과는 다른 일들이어서 더 바쁜 것처럼 느껴졌을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바쁘게 산 것은 확실하다. 주변에서는 바쁜 것이 좋다고 하지만 바쁘면 아무래도 시간에 쫓기는 상황이 생기고 마음의 여유가 없게 될 수 있어서 늘 마음 한쪽으로는 여유를 잃지 말자, 특히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잃지 말자 하는 생각을 하면서 지내게 되었다. 종종 걸음 치며 바쁘게 지내다가 연말에는 좀 모든 것을 내려놓자 하고 며칠 푹 쉬는 시간을 가졌다.

연말에는 보통 시댁에 가서 어른들과 새해를 같이 맞이한다. 혼자 계시는 시어머님은 옛날 이야기를 끝없이 회상하시는데 몇십 가지의 레퍼토리가 있다. 그중의 하나가 신혼 초 고생하시던 이야기인데 시아버님이 아침에 출근할 때 시계가 없어서 달이 뜬 모습을 보고 대강 시간을 가늠하고 출근을 하셨다는 것이다.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이다. 시계가 없이 새벽에 출근 시간에 늦지 않도록 매일 달을 보고 가늠해서 제시간에 출근하는 일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요즈음과 같이 시간을 분초 단위로 관리되는 사회 분위기에서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시간을 분초단위로 잘라서 앞뒤의 순서관계로 연결하여 이해하는 방식은 근대에 와서 더욱 강화되었다고 한다. 매년 연말이 되면 시간은 상관없이 지나가는데 인간이 이것을 토막 내어서 굳이 한해가 넘어가도록 만들었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된다. 아마도 시부모님이 사시던 시대에 비해서 조선시대에는 시간을 토막내서 사는 방식이 훨씬 더 느슨했을 것이다. 하루가 해 뜨고 해지는 낮과 밤 정도로 구분되었거나 조금 더 세분되면 하루 세끼의 식사 시간의 토막 정도로 나뉘어 졌을지도 모른다. 중천에 해 뜨면 만나자고 하는 것과 12시 반에 만나자고 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을 전혀 다른 세상으로 만들어 내는 일이다.

시간의 토막을 느슨하게 한 게 아니라 아예 그 매듭을 없애 버린 화가는 살바도르 달리이다. 그는 '기억의 지속'이라는 그림을 통하여 고향 마을의 바닷가를 배경으로 흐물흐물 녹아 내리는 시계들이 여기 저기 널려 있는 모습을 그렸다. 시계들이 흐물흐물 녹아서 빨래 널리듯 걸려 있는 모습은 묘하고도 충격적인 감정을 갖게 한다. 자로 잰듯한 세상을 매듭도 없고 구분도 없고 경계가 없는 세상으로 전복해 버리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다. 딸깍 딸깍 움직이는 초침이 시간을 조각 조각 쪼개어 나가는 세상을 흐물흐물한 시간으로, 녹아서 늘어지는 시간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의 제목은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이다. 흐물 흐물 녹아 내리는 까망베르 치즈로부터 영감을 얻었다는 이 그림은 다양한 해석들을 하지만 나는 시간을 분절하고 쪼개는 근대의 현상에 '원래 시간이란 이렇게 자르거나 나눌 수 없는 흐물 흐물한 것이야' 하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한다. 바쁘게 움직이고 시간에 쫓기며 사는 세상에서 시간을 느슨하고 느긋한 밀가루 반죽과 같은 것으로 바꾸어 생각하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아마도 달리가 이를 '기억의 지속'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은 우리의 기억이란 그렇게 토막난 것들을 이어 붙인 것이 아니라 그냥 전체로서 통으로 이해되는 그런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느슨한 시간과 달리의 그림을 생각하며 올해는 그렇게 살아야지 다짐하다가 문득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에 나오는 시나이 사막에서의 단상을 써 놓은 문장들이 떠올랐다. "자신만만하게 굽이치는 낙타의 율동을 따르면 피와 더불어 영혼도 그렇게 된다. 서양의 명석하고 빈틈없는 이성에 의해 모욕적으로 토막토막 잘라진 기하학적 구분에서 시간이 스스로 해방된다. <사막의 배>가 흔들거리는 이곳에서라면 시간이 수학적이고 단단히 구분된 폐쇄로부터 풀려 나와 나누어지지 않는 액체이고 가벼우며 사상을 환상과 음악으로 바꿔 놓는 어지러운 도취가 되어 하나의 실체를 이룬다…." 카잔차키스는 액체처럼 흘러내리는 시간이 딱딱한 생각들을 환상과 음악으로 바꾸어 놓는다고 하였으니 그의 말대로 올해는 느슨하게 지내며 바쁜 일상이 그냥 바쁜 것이 아니라 환상과 음악으로 변화하는 경험을 하고 싶다.



/백향기 대전 창조미술협회 회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세종시 제천서 실종된 40대 남성… 여전히 행방묘연
  2. 이장우 "3대하천 준설 덕에…더는 물난리로 불편 없도록"
  3. 이상민, 국민의힘 대전시당위원장 '재선출'
  4. 천안교육지원청, 호우 특보 관련 비상대책회의 개최
  5. "위험경고 없었다" 금산 수난사고 주장 엇갈려
  1. 19일까지 충청권에 180㎜ 더 퍼붓는다…침수 피해 '주의'
  2. 새솔유치원, '북적북적 BOOK 페스티벌'로 독서 문화 선도
  3. 대전천 휩쓸린 50대 숨진채 발견…대전충남 폭우 4명 사망
  4. [문예공론] 점심 사냥
  5. 8년간 재활용품 수집으로 모은 1천만원 기부한 86세 이형진 할아버지

헤드라인 뉴스


19일 오후부터 충청권에 또 폭우…침수·담장 붕괴 등 피해

19일 오후부터 충청권에 또 폭우…침수·담장 붕괴 등 피해

19일 새벽부터 대전·세종·충남에 다시 강한 비가 쏟아지면서 침수, 담장 무너짐 등 크고 작은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현재 호우 특보가 발효 중인 가운데, 기상청은 이날 오후 시간당 30~50㎜ 안팎의 장대비가 더 쏟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대전·세종·충남소방본부에 따르면, 이날 오전까지 대전 3건, 충남 5건의 비 피해신고가 접수됐다. 모두 침수, 가로수 전도 등 안전조치 요청 건으로 다행히 인명피해나 구조 신고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대전에서는 오전 9시 52분께 서구 가장동의 한 빌라 담장이 무너져 주민 신고가 접수됐다. 앞..

제10회 대한민국 국제 관광박람회 18일부터 나흘간 개최
제10회 대한민국 국제 관광박람회 18일부터 나흘간 개최

올해로 10회를 맞은 대한민국 국제 관광박람회(KITS:Korea International Tourism Show)가 18일부터 21일까지 나흘간 일산 킨텍스 제2전시장 7홀에서 열린다. 대한민국지방신문협의회와 KITS조직위원회가 공동 주최하고 ㈜한국전시산업원이 주관하는 이번 박람회는 국내외 관광업계 정보 제공의 장과 관광객 유치 도모를 위한 비즈니스의 장을 마련해 상호 교류의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할 예정이다. KITS는 관광객 유치를 위해 지역별 특색을 살린 여행 콘텐츠와 국제 관광도시 및 국가 홍보, 국내외 관광 콘텐츠 간 네트워..

[이슈현장] 꿀벌이 사라진다… 기후위기 속 대전양봉 위태
[이슈현장] 꿀벌이 사라진다… 기후위기 속 대전양봉 위태

우리에게 달콤한 꿀을 선사해주는 꿀벌은 작지만 든든한 농사꾼이기도 하다. 식탁에 자주 오르는 수박, 참외, 딸기 역시 꿀벌들의 노동 덕분에 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전 세계 식량 공급의 약 90%를 담당하는 100대 주요 농산물 중 71종은 꿀벌의 수분 작용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꿀벌들이 사라지고 있다. 기후변화와 '꿀벌응애'라는 외래종 진드기 등장에 따른 꿀벌 집단 폐사가 잦아지면서다. 전국적으로 '산소호흡기'를 들이밀듯 '꿀벌 살리자'라는 움직임이 일고 있으나 대전 지역 양봉..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위험한 하굣길 위험한 하굣길

  • 폭우에 대전 유등천 교량 통제 폭우에 대전 유등천 교량 통제

  • 민생회복 소비쿠폰 접수창구 준비 민생회복 소비쿠폰 접수창구 준비

  • 밤사이 내린 폭우에 충남지역 피해 속출 밤사이 내린 폭우에 충남지역 피해 속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