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 지극히 바라보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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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지극히 바라보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 승인 2024-04-01 16:03
  • 신문게재 2024-04-02 19면
  • 조훈희 기자조훈희 기자
조훈성 연극평론가
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아버지께서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이번만큼은 '대전연극제' 작품을 다 보겠노라 굳게 다짐까지 했는데 두 번째 날, 극단 라일락의 '백파'를 보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엄마의 급박한 전화 목소리에 일이 심상치 않음을 안다. 그렇게 아버지가 갑자기 혼수상태로 끝내 응급실에서 못 깨어난 채 영원히 헤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용두동에 가서 아버지의 의복과 침구를 정리한다. 당신의 성경 필사 노트를 들여다보다 저 한 글자, 한 글자 옮김의 시간 속에서 당신의 숨을 상상해본다. 딸애와 영정을 놓고 초를 켜니 한껏 촛불이 일렁이다 잠잠해진다. 일렁이다 잠잠해지는 그 촛불 마냥 삶이 그러하다.

'판소리공장 바닥소리'의 <체공녀 강주룡>를 보기 위해 서울 대학로 소극장을 찾는다. 극장 오는 내내 물속을 걷는 듯했는데, 1930년대 평양, 을밀대의 지붕 위에 올라 노동해방을 외쳤던 '강주룡'이라는 강단진 한 여성의 삶의 서사를 바라보면서 어느덧 다시 극장에서의 호흡을 찾는다. 1931년의 '체공녀'가 오늘의 연극에 등장하는 게 특별하게 봐진다. 극중 '강주룡'의 기억의 파편, 그 분신들을 통해 너도나도 '강주룡'이 될 수 있는 이 연극에서 "저기 사람이 있다"는 외침이 계속되는 있는 '오늘'이 달지 않게 다가온다. 부지런한 걸음으로 대전오페라단의 창작 오페라 <이상의 날개>를 보기 위해 국립극장 달오름으로 향했다. 소박할 것이라 생각했던 스케일이 기대 이상이지만 왜 '이상'인가에 대한 설득이 다소 아쉽다. 우리가 많이 아는 '김해경'의 삶과 작품의 가이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그 인물의 절망적 세계에 대한 인식을 다시금 곱씹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내가 무슨 '이상'이나 되는 듯 누구를 위한 예술이던가를 물으며 오늘의 고개를 올라갔다가 도로 내려온다.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한다. 무엇을 이리 많이 모아놨을까. 이 가지고 가지도 못할 아버지의 짐들… 홀연히 세상을 떠날 수 있으려면 비움을 연습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나도 아버지처럼 짐을 끌어모으고 끊임없이 더하고 있다. 어쩌면 그 짐이야말로 삶의 이유이지 않을까를 생각하며 내가 극장을 이리 다니는 걸음, 걸음이 왜 이렇게 무거운가를 곰곰이 따져본다. 지역문예지 신입 편집장이 되어, 회원 명부를 뒤적이며 원고청탁을 위해 일일이 전화하면서 신작을 부탁한다. 작품 한 편, 한 편의 세계를 덧붙여 잇는다는 게 참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면서 스스로 위안을 갖는다.

다시 극장을 찾는다. 영국의 극작가 크리스 톰슨이 젊은 범죄자와 아동을 보호하는 사회복지사로 살아온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 극단 비밀기지의 연극 <카르타고>를 본다. 극중 '토미는 누가 죽였는가'라는 질문, 사회시스템의 사각지대를 다룬 사건의 서사와 트라우마적인 사건 안에서의 진실을 둘러싼 인물의 입장 간 다른 역학관계가 촘촘히 작품 안에 펼쳐지며 '책임'에 대한 단면적 문제 인식을 극복해낸다. 이어 월북작가 함세덕의 <고목>을 무대화한 극단 돌파구의 작품도 바라본다. 1946년 여름 실제로 일어났던 수해 참사와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수해구제운동이 이 연극의 배경이다. 극중 거복의 기와집과 500년 된 은행나무는 무대에 보여지지 않지만 사물화되지 않은 그 형상의 상징이 비범하게 보인다. 함세덕의 그때와 그곳, 그 사람들이 2024년 지금, 여기, 우리들로 거울처럼 똑같이 마주하고 있다는 세계인식 덕분이다. 그러면서 무대에서 건너오는 그 목소리, 몸짓에 실소가 터져 나오면서도 불편했던 것은 바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세계의 바라봄이 아니었던가.



뭐뭐 할 것들의 계획표를 여기 붙이고 저기에 적어두면서도 일이 손에 쉽게 잡히지 않는다. 회복된 것 같은데 전혀 회복된 게 아니다. 스스로 괜찮다 여기는데, 괜찮지가 않다. 49재 날짜를 헤아리면서 그때가 되면 괜찮지 않은 것들이 괜찮아질 것인지 궁금하다. 그저 막막하니 먹먹하니. 괜찮은 것 같은데 괜찮지가 않다. 그 원래로의 회복은 없어진 것을 찾을 수가 없기에 불가능한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삶은 '분실물'처럼 되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지나쳐 가는 것이 분명하다. 연극을 바라보면서 봄이 왔나 싶다. 그 봄에 꽃이 펴도 그렇게 지극히 바라보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극장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알게 된다. /조훈성 연극평론가·충남시민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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