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만필] 빈틈 많은 교사와 그 안에서 스스로 배우는 학생들

  • 오피니언
  • 교단만필

[교단만필] 빈틈 많은 교사와 그 안에서 스스로 배우는 학생들

보령 개화초등학교 박라은 교사

  • 승인 2024-05-16 14:33
  • 신문게재 2024-05-17 18면
  • 이현제 기자이현제 기자
20240516_보령_개화초 교사 박라은
박라은 교사
나는 허술한 교사라고 감히 고백한다.

3월 초, 새 학기 맞이 준비를 위한 교실청소가 완벽하게 되지 않았다. 큰 먼지들과 쓰레기들은 교실 중간중간에 버려져 있었고, 학생들의 책상 위 먼지도 닦지 않았다. 3월 2일. 아이들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교실에 들어온 학생 중 한 명이 이런 말 해도 되느냐는 표정으로 멋쩍게 웃으며 말한다.



"교실이 좀 더러운 것 같아요."

"어,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몇몇 학생들이 연달아 맞장구를 친다.



"이미 충분히 더러우니, 더 더러워질 일은 없겠고, 그럼 치우는 일만 남았네?" 나는 조용히 청소의 주도권을 학생들에게 넘긴다. 아이들은 자기 책상을 비롯한 교실 이곳저곳을 쓸고 닦는다. 어른인 나의 눈으로 보기엔 뒷손이 많이 가는 어설픈 솜씨이기 짝이 없다. 손바닥만 한 물티슈로 교실 바닥을 닦고 있는 모습 하며, 쓰레받기에 쓰레기를 제대로 올리지 못하는 서툰 빗자루질들.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라는 답답한 마음을 뒤로하고 아이들이 스스로 청소를 완성할 수 있도록 지켜본다. 나 혼자 쓸고 닦으면 10분 걸릴 일을, 한 시간가량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자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아뿔싸, 그런데 청소를 마친 아이들의 모습에는 뿌듯함이 역력하다. '땀 흘리며 뭔가를 해냈다'하는 저 표정을 보니 '그래 맞다, 완성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청소를 하고 싶게 만드는 동기가 중요한 거였지. 청소가 재밌다는 인식을 심어줬으니 이만하면 됐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에피소드 하나로 "아이들이 1년 내내 청소를 잘하던가요?" 라는 물음이 들린다면 나는 단호하게 "아니요. 그럴 리가요"고 답한다.

3월 2일 첫날 청소 후, 교사인 내가 청소를 강요하지 않으니 교실은 순식간에 더러워졌다. 하루, 이틀, 사흘, 그리고 꽉 채운 일주일. 교실은 붙임 딱지 조각들과 구겨진 가정통신문, 돌아다니는 학용품들로 '막장'이 됐다.

보다 못한 한 명이 "청소해야 돼요. 교실이 너무 더러워요"라며 청소가 필요하다고 읍소한다. 옳거니 기다리던 바다. 나는 차분한 척, 청소를 왜 해야 하는지, 진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그럼 언제 하면 좋을지 아이들에게 차근차근 물었고, 청소구역과 청소 담당, 청소하는 주기, 청소 시간 등을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나 자주 청소를 해야할까라는 회의 중 남학생 한 명이 "한 달에 한 번이요"라고 답한다. 얼씨구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찰나, 그 옆에 있던 남학생이 "한 학기에 한 번"이라며 웃는다. '어어? 이놈들 봐라?' "그렇게 청소를 자주 안 하면 교실이 더러워질 테니, 그건 안돼. 한 달에 한 번은 너무 적어"라고 말하고 싶은 속내를 꾹 누른다. 청소 주도권은 학생들이 이미 가져갔으니, 나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지켜보는 역할만 해야 하는 셈이다. 저들끼리도 한 학기에 한 번은 너무 심했는지, 결국 우리 반은 '한 달에 한 번만 청소하면 되는 학급'으로 결론이 났다. 이제 지저분한 교실을 견뎌야 하는 교사와 학생들, 그리고 더럽고 행복한 학생들만 남은 셈이다.

결론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할 독자를 위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확히 '12일'이 걸렸다. 청소 주기를 다시 정하자는 자발적 학급회의가 열리기까지. '더러워서 못 견디겠다'는 학생들로부터 시작된 자발적 긴급회의였다. 이러한 시행착오를 겪은 우리 반은 최종적으로 일주일에 3일 청소를 하는 학급이 됐고, 학교에서는 '청소를 야무지게 잘하는 학생들'로 유명해진 건 덤이다.

"학생들이 어쩜 그렇게 청소를 잘해요"라고 물어보는 동료 교사들에게 난 매번 "놔두니 알아서 하더라고요"라고 싱겁게 답한다. 그러니 '완벽한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일까?'라는 나의 의문은 여전히 유효할 수밖에 없다.

남은 학기도 여전히 아이들에게 넘겨줄 주도권의 카테고리를 머릿속에 그려본다. 교실의 주인이 교사인 척 모든 것들을 황제처럼 지휘하고 지시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교육의 목표는 순종이 아니라 독립이라는 어느 교육자의 말을 나는 오늘도 마음에 새긴다. /보령 개화초등학교 박라은 교사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안양시, 평촌신도시 정비 ‘청신호’ 가속
  2. 위기 미혼한부모 가정에 3000만 원 후원금 전달
  3. 환자 목부위 침 시술 한의사, 환자 척수손상 금고형 선고
  4. 대전서 교통사고로 올해 54명 사망…전년대비 2배 증가 대책 추진
  5. 자립준비청년 자기계발비 300만원 후원
  1. 천안시, '담헌달빛관' 개관
  2. 유성구장애인종합복지관 '2025년 활동지원사 힐링나들이'
  3. 장애인 보조견 환영합니다
  4. “웃으며 배우는 가족 소통법”
  5. 인문정신 속의 정치와 리더십

헤드라인 뉴스


충남도, 민자 4000억 유치 `K-모빌리티 허브` 만든다

충남도, 민자 4000억 유치 'K-모빌리티 허브' 만든다

충남도와 당진시가 국내 기업과 손잡고 당진항 일원에 대한민국 자동차 수출을 이끌어갈 최첨단 복합물류단지를 조성한다. 조성이 성공적으로 완료된다면, 민선8기 도가 중점 추진 중인 '베이밸리 건설'과 '당진항 수출 전진기지 육성' 전략이 한층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김태흠 충남지사는 17일 도청 대회의실에서 오성환 당진시장, 이정환 SK 렌터카 대표이사 등과 '케이(K)-모빌리티 오토 허브 일반물류단지 조성 사업' 추진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전국 처음으로 자동차산업과 항만물류를 결합시킨 K-모빌리티 오토 허브 일반물류단지는 당진..

대전 청약시장 쏠림현상 뚜렷… 옥석가리기 심화되나
대전 청약시장 쏠림현상 뚜렷… 옥석가리기 심화되나

올해 대전 아파트 청약시장에서는 특정 지역으로 수요가 집중되는 쏠림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입지와 분양가 등 경쟁력을 갖춘 인기 단지가 선별되면서 '옥석 가리기'가 한층 심화되는 분위기다. 17일 한국부동산원 청약홈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최근 분양에 나선 '도룡자이 라피크'가 침체된 분양 시장에서 높은 인기를 끌었다. GS건설이 공급한 도룡자이 라피크는 1~2순위 청약에서 214세대 모집에 3636건이 접수되며 평균 16.9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특히 84㎡B형은 59.16 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이며 대부분 1..

민주당, 내년 지방선거 공천 위해 모든 당원 ‘1인 1표’ 도입
민주당, 내년 지방선거 공천 위해 모든 당원 ‘1인 1표’ 도입

2026년 6월 3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이 공천을 위해 모든 당원에게 ‘1인 1표’를 부여하는 내용의 당헌·당규 개정에 착수한다. 그동안 대표나 최고위원 선출 시 대의원과 권리당원 투표 반영 비율을 20:1 미만으로 했던 규정을 개정해 모든 당원에게 투표권을 동등하게 부여하겠다는 것이다. 정청래 대표는 17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에서 "내년 6·3지방선거에서 열린 공천 시스템으로 공천 혁명을 이룩하겠다"며 "19일과 20일 이틀간 1인 1표 시대 당원 주권 정당에 대한 당원 의사를 묻는 역사적인 전 당원 투표를 실시한..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계절의 색 뽐내는 도심 계절의 색 뽐내는 도심

  • 교통사망사고 제로 대전 선포식 교통사망사고 제로 대전 선포식

  • 2025 청양군수배 풋살 최강전…초등 3~4학년부 4강전 2025 청양군수배 풋살 최강전…초등 3~4학년부 4강전

  • 2025 청양군수배 풋살 최강전…초등 5~6학년부 예선 2025 청양군수배 풋살 최강전…초등 5~6학년부 예선